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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천사인 척 하고 싶지 않아”

등록 2018-11-24 10:07수정 2018-11-24 11:20

[토요판] 인터뷰
재독 호스피스·성소수자 김인선씨

마산 부잣집의 혼외자로 태어나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 생각
22살에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 돼
결혼까지 했지만 행복하지 않아

새 사랑 이수현씨 만나 동반자 돼
함께 호스피스 단체 만들어 활동
지난 5월 한국 찾아 강연도 해
“성소수자 터부시 분위기 달라져”
지난 5월20일 인천광역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제6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김인선씨가 ‘여성 성소수자, 그 삶의 자유와 공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제공
지난 5월20일 인천광역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제6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김인선씨가 ‘여성 성소수자, 그 삶의 자유와 공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제공
“후회하지 않아요, 정말로.”

김인선(68)씨가 삶을 되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1972년 독일로 건너가 정착한 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을 감행했다. 이제 와 새삼스레 비장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라고 덧붙인 뒤 말려 올라간 그의 입꼬리에선 힘이 느껴졌다. 국가와 혼인제도와 성별의 경계를 스스로 뛰어넘은 한 인간에게 걸맞은 자신감이었다.

한국에선 ‘나이 든 여성 성소수자’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들은 이 땅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본 적이 없으니 없다고 믿기 쉽다. 빈곤한 상상력이 기댈 곳은 영화·드라마 등 대중매체뿐이지만 이 역시 척박하다. 최근 10여년 동안 대중매체에서 성소수자의 자리는 조금씩 넓어져 왔지만 그마저도 젊은 게이에 국한되거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로 재현되기 일쑤다.

김인선씨는 이미 독일에서 40여년을 살았고 일흔을 내다보는 나이지만, 그의 인생은 한국에서 여전히 미래다. 이주민·성소수자·여성이라는 다층적 소수자성을 지닌 그를 지난 1일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 삶 굽이굽이에 맺힌 이야기를 들었다.

‘비정상’ 딱지 벗어나려 독일로

김인선씨는 1960∼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한국인 파독광부·간호사를 비롯해 동아시아 이주민의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5년 호스피스 봉사단체 ‘동행’(현재 이름은 ‘동반자’)을 만들고 2016년까지 대표로 일했다. 2012년에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맞이한 파독광부·간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저서 <내게 단 하루가 남아있다면>을 출간했다.

그는 여러모로 ‘불온’했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랬다. 1950년 경남 마산에서 혼외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연애 중 덜컥 그를 가졌다. 아버지에게 숨겨둔 처자식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개월 뒤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외할머니 손에 길러졌다.

“내가 7살 때 엄마가 공부 마치고 한국에 왔어요. 어디서 갑자기 정말 예쁘고 세련된 여자가 나타나서는 그때부터 날 구박하기 시작하는 거야.(웃음) 제 아비 닮아서 이마는 툭 튀어나오고 다리는 짧고 엉덩이는 쳐졌다고. 엄마는 맨날 ‘저것만 없었어도…’ 그랬어요. 결국 아버지 집으로 내쫓겼지.”

지금이야 넉넉히 웃으며 말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살얼음판이었으리란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마산에서 소문난 부자였던 아버지 집엔 그와 같은 혼외자식이 10명쯤 있어 “꼭 고아원 같았다”. 있는 구박 없는 구박을 다 받던 그는 유난히 서러운 날이면 두 시간씩 걸어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서러운 발걸음이 반복되자 외할머니는 작심하고 그를 데려왔다.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포기한 채 마작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어머니는 ‘미혼모’ 딱지를 벗어나려 애쓰다 독일인인 유엔(UN) 직원과 재혼해 한국을 떠났다. 김인선씨는 망가진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거침없이 자랐다. 당시 소녀들이 지겹게 들었을 “몸가짐 조신히 해서 시집 잘 가야 한다”는 밥상머리 교육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는 “그때 제멋대로 굴던 배짱이 독일에 정착할 때는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비정상’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가혹함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통속소설에나 나올 법한 ‘몰락한 부잣집 사생아’로 불렸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출생 배경은 물론이고 서양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16살 때 외할머니마저 잃고 막내 이모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한 뒤론 더욱 그랬다.

맘 둘 곳 없는 한국을 떠나 아무도 과거를 모르는 곳에서 새 출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당시 아프리카에 있던 어머니는 빈말이라도 “도와주겠다”는 말 한마디 안 했지만 “원한다면 독일로 초청해줄 수 있다”고 했다. 독일 본에 있는 성 요하네스 수도원에서 간호 공부를 한다는 조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선포한 1972년 그는 한국을 떠났다.

한국만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섹스 영화’라고 크게 적힌 영화관에 대낮부터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서로 좋으면 이 사람이랑 자고 저 사람이랑도 자고. 타락한 나라에 온 줄 알았어요.”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문화, 맛 없는 밥, 뜻 없는 간호 공부…. 그는 한국에 돌아갈 비행기 삯을 모으기 시작했다.

3년이나 걸렸다. “다시 돌아가 만난 한국은 내가 떠나온 그 나라가 아니었어요. 내가 그사이 변한 거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집은 망했고, 이모도 한국을 떠났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 사생활을 캐묻는지. 독일 생활 3년만에 그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곧장 독일로 돌아가 간호학교 3년 과정을 수료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34살에 결혼을 했다. “나이 찼으니 결혼하라”고 보채는 한인 교회 사람들 등쌀에 중매로 만난 파독광부였다. 착실한 성격에 벌이도 좋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은 독일 여성이 되어버린 김인선씨는 ‘조신하고 공손한 아내’를 원하던 남편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만족하지 못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으로 안 채워지는 틈이 있더라고. 더 원천적인 것들, 정신적인 것들. 남편은 자꾸만 집 사고 애 낳자고 하는데 난 둘 다 싫었어. 그러면 꼭 완전히 매일 것 같아서.”

당시 그가 일하던 병원에선 여성 의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독일에 성차별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여성에게 현모양처나 남성의 보조 역할만을 요구하는 한국과는 분명 달랐다. 김인선씨도 욕심을 내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 한국인 광부들은 남편에게 “여자는 많이 배우면 남자 버리고 도망간다”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아비투어(독일의 대학 입학 자격)를 딴 뒤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독일 교육은 그를 새로 태어나게 했다. “한국에선 ‘그거 아니야, 그거 틀렸어’ 이런 말 정말 많이 듣잖아요. 독일에서 학교 다니면서 그런 소리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내 의견이 존중받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겪고 나면 사람 의식이 바뀌어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남편과의 대화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결혼 5년만에 그는 독일 전역 한인 교회의 여성 신자들이 모이는 세미나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베를린에서 일하던 파독 간호사 이수현씨였다. 기계 수리에 능하고 오토바이를 잘 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인선씨에게 대뜸 꽃을 꺾어다 주더니 전화나 편지로 적극 구애했다.

이수현씨와의 첫 만남을 설명하는 김인선씨의 얼굴에 몽글몽글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자기 동반자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설레는 얼굴을 하는 60대 노인을 만나기는 처음이었지만, 그는 평범하게 행복해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냄새가

“독일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요. 수현이가 딱 그랬어. 나한테 팔을 턱 올리면서 안아주는데 이상하게 향이 좋은 거야. 따듯하고 묘한 향. 집에 돌아왔는데도 그 친구가 잊히질 않았어요.”

두 사람은 도르트문트와 베를린을 수차례 오갔다. 김인선씨는 이혼을 제안했고 남편은 펄펄 뛰었다. 남편은 동네방네 전화를 걸어 아내가 여자랑 바람났다고 소문을 냈다. 위자료 한 푼 못 준다고 엄포도 놨다. “아주 그때 독일이 떠들썩 했어.(웃음) 난 공부시켜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돈 필요 없으니 이혼하자고 했어요.”

이혼 소식에 평소 연락도 뜸하던 어머니까지 찾아왔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 때문에 이혼을 하다니 미쳤어. 환자야. 다시는 보지 말자”며 타박했다. 한인 교회 사람들도 “목사될 생각은 꿈에도 말라”며 등을 돌렸다. 어차피 돈과 사람에 기대 살아온 인생도 아니니 그까짓 괜찮았다. 혼자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익숙한 그에게 이제는 이수현이라는 동반자가 생긴 참이었다.

속앓이도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남편과 이혼하고 이수현씨와 베를린에 정착했지만 한쪽에선 “이래도 되나” 하는 혼란이 계속됐다. 그는 신학과 교수를 찾아가 “난 아무래도 하자가 있어서 신학을 그만둬야겠다”고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때 교수가 해준 이야기는 아직 마음에 두고두고 남아있다.

“대체 ‘하자’가 뭡니까? 하나님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를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순수한 마음인지를 보십니다. 자기 자신을 못 받아들이는 인선씨야말로 꼭 신학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후 그는 독일 훔볼트 대학에 진학해 신학 석사학위까지 얻었다.

베를린에서의 새로운 삶이 얼추 몸과 마음에 익숙해진 즈음이었다. 영영 인연 끊자며 떠난 어머니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딸에게 연락을 해왔다. 어머니는 베를린까지 찾아와 열흘간 머물며 딸이 여성 파트너와 사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는 떠나는 날 “나도 20년만 젊었으면 여자랑 살아보고 싶다”는 농담으로 딸의 삶을 인정했다.

김인선씨는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수현씨와 동거 중이다. 2005년 두 사람이 보험금과 퇴직금을 털어 만든 ‘동행’에서 함께 활동해왔다.

그는 일흔을 앞둔 나이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독일 의회는 동성결혼 법제화를 통과시켰다. 이미 2001년 동성 동거인을 법적 파트너로 등록할 수 있는 법안이 도입된 상태였고, 그에게는 결혼이 그리 중요하진 않다. 하지만 “수현이의 소원”이라고 했다.

“수현이가 ‘너는 결혼 한번 해봤지만 난 안 해봤다’면서 자꾸 결혼하재요. 서류 만들어서 관청에 가야 하고 귀찮은데, 소원이라니까 들어줘야지.”

김인선씨(왼쪽)와 그의 파트너인 이수현씨. 김인선 제공
김인선씨(왼쪽)와 그의 파트너인 이수현씨. 김인선 제공

격세지감 느낀 한국 방문

지난 5월 그는 한국을 방문했다가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했다. 인천에서 열린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5월20일 ‘여성 성소수자, 그 삶의 자유와 공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강연자로 나섰는데 생각보다 젊은이들의 관심이 뜨거웠던 것이다. 존재 자체가 터부시 되던 1970년대의 한국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친구들한테 ‘나 한국에서 커밍아웃했다’고 자랑했어요.”(웃음)

하지만 한국에서 성소수자로서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다. 강연이 끝난 뒤 고등학생 나이로 보이는 한 학생이 찾아와 “레즈비언인데, 자살까지도 생각해봤다”고 말했을 때는 그 어린 마음에 났을 숱한 생채기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 거야. 많은 걸 참고 살겠지. 하지만 한국도 더 달라지겠죠?”

그는 “나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나”라고 단언했다. “난 하도 고생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싫고 좋고가 굉장히 분명해요. 항상 나한테 솔직하게 살고 싶었어요. 천사인 척 하고 싶지 않아.”

사랑 앞에 당당하고, 삶을 후회하지 않고, 자신을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김인선씨 같은 ‘퀴어 롤모델’이 계속 생겨난다면 한국 사회의 변화도 더 빨라질 것이다.

베를린/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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