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은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며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다.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텅 빈 더불어민주당 의원석 사이로 걸어 나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국회 무시 사과하라”, “이 ×× 사과하라”, “야당 탄압 중단하라”고 요구하며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며 우리는 공감이 없을 때 더 공평하고 공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이 <공감의 배신>(2016)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그가 칼럼을 통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한 사회학자는 블룸을 “지적 망신이자 도덕적 괴물”이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왜 이런 비난이 나왔는지는 포털에서 “공감 능력이 없다”는 문장을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게 얼마나 심한 비난, 아니 욕인지 실감하실 게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정치적 비방 용도로 자주 쓰이곤 하는데, ‘소시오패스’라는 딱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은 보수보다는 진보 쪽에서 더 많이 쓰는 욕이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공감은 진보적인 도덕적 세계관의 핵심이다”라고 주장했듯이, 주로 진보가 보수를 향해 자주 퍼붓는 비난 중의 하나가 바로 공감 능력의 결여다. 그러나 블룸의 경우처럼 최근 들어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 같다.
독일의 인지과학자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공감의 두 얼굴>(2017)이란 책에서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흑백 사고 또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인다”며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최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에서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진화학자 장대익이 지난달 말 출간한 <공감의 반경―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라는 책은 블룸이나 브라이트하우프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고민의 결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타인이라는 지옥’에서 ‘타인이라는 복지’로의 변환을 상상하는 모든 세계시민에게” 바치겠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목표는 야심만만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혐오의 집단적 갈등이 바람직하거나 생산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보자면 이 책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편 가르기와 그에 따른 국민적 차원의 집단 패싸움에 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대익은 “우리의 편 가르기는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온다”며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일종의 인지 및 감정을 소비하는 자원이므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 공감을 과하게 쓰면 다른 집단에 쓸 공감이 부족해진다. 자기 집단에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최근 상황이 딱 이렇다. 특정 정치인을 둘러싸고 광화문과 서초동 법원으로 갈라진 무리를 보지 않았는가? 이 두 광장의 갈등은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너무 강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다. 공감 그 자체가 문제 될 건 없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늘 선택적 과잉 공감을 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 편에 대해선 무한대의 공감을 하지만 반대편에 대해선 공감은커녕 최소한의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건 악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미 자기편에 쏟은 무한대의 공감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고 한다. 심지어 반대편에는 비인간적으로 잔인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선택적 과잉 공감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을까? 장대익은 감정이입과 같은 정서적 공감을 넘어서 역지사지와 같은 인지적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내집단 편향을 만드는 깊고 감정적인 공감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공감의 ‘구심력’으로, 외집단을 고려하는 넓고 이성적인 공감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공감의 ‘원심력’으로 부른다. 그러면서 이런 해법을 제시한다. “공감의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선택적 과잉 공감’의 비극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기존의 맹목적 공감 예찬론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 공감 상태가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 인정해도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다. 선택적 과잉 공감은 아예 그 어떤 공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