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든 건 언론이었다. 아무리 절규하고 발버둥 쳐도 언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인 건 수사가 본격화되고 시민들의 분노가 불붙은 뒤였다.”
지난 2016년 5월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던 권석천이 ‘나는 왜 ‘가습기 살인’을 놓쳤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용감한 양심선언이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카이스트 과학저널리즘 7기 연구팀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언론보도에 대한 고찰’ 연구결과 발표에서 “기자들의 출입처 제도가 이번 사태 취재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진단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자들의 출입처 제도는 권위 있는 뉴스 공급원으로부터 뉴스거리를 쉽게 무료로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산업엔 큰 축복이다. 하지만 출입처 제도는 ‘권언유착과 발표저널리즘의 온상’이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그래서 폐지론까지 나오기도 했다. 나는 출입처 제도를 유지하되 출입처 이외의 곳에서도 뉴스거리를 찾는 걸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보완하자는 타협책을 제안하고 싶다.
많은 국민을 크게 실망시킨 새만금 잼버리와 부산 엑스포 유치 문제를 보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다시 거세게 비난하더라도 언론이 성찰해야 할 점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신문의 독자권익보호위원회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인상적이다.
“새만금 잼버리와 부산 엑스포 유치 모두 직전까지 언론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장밋빛 전망을 하다가 급작스럽게 일을 당했다. 해외 주요 언론들이 엑스포 유치 판세를 전망할 때 사우디 우세가 압도적이었고, 외교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유치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는데, 우리 언론은 한번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 언론도 책임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폭탄 우려 사태는 어떤가. 11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이 홍콩에이치(H)지수 이엘에스를 70대 이상 연령층에게 판매한 규모만 약 2조원에 이른다는데, 그간 언론은 이런 문제의 가능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걸까? 이런 질문 자체가 언론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은 기존 출입처 제도로는 예방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이다.
나는 언론이 불행한 사건·사고에 대한 ‘예방 저널리즘’을 위해 좀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다. 큰 사건이 터진 뒤에 뒷북만 치는 이른바 ‘뒷북저널리즘’에 대한 독자의 염증이 극에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 저널리즘도 출입처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싸움 자체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닌지 살펴보면 좋겠다.
주요 언론사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주요 콘텐츠 메뉴를 보자. 대부분 정치 투쟁이다. 정당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각 언론사의 색깔에 따라 정파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유튜브 소비의 최강 실세인 강성 지지층을 염두에 둔 전략이겠지만, 이 전략은 유튜브가 아닌 언론사 몸통의 콘텐츠와 논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기사 제목들부터 유튜브의 선정주의를 추종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독자들을 그런 식으로 길들이면 이성적인 논의와 주장이 들어설 자리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에 못지않은 문제는 이미 ‘정치 과잉’인 상황에서 정치의 비중이 더 커질 가능성이다. 국익과 민생을 위한 정책 중심의 정치 기사라면야 바람직하겠지만, 강성 독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론은 그 어떤 명분을 둘러대건 증오와 혐오를 팔아야 한다. 이건 ‘팬덤 정치’의 뒤를 이은 ‘팬덤 언론’ 현상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열성 고객들이 원하는 걸 줘야만 하는가? 그들은 늘 옳은가? 소매유통업체들이 앞다투어 내세운 “고객은 늘 옳다”는 슬로건은 이젠 언론이 꼭 지켜야 할 원칙이 되어야 하는가? 그 원칙의 이행을 위해 모든 논객은 눈에 핏발을 세우는 진정성을 갖고 적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담론의 생산에 주력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치를 증오·혐오의 발산 기회로만 이용하지 말고, 언론 자신의 문법을 의심해 보자. 지금 언론은 사회적 불행과 비극의 예방은 포기한 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린 불행과 비극을 증폭시키는 역할에만 충실한 건 아닌지 돌아보자. 팬덤을 존중하면서도 ‘팬덤 정치’와 ‘팬덤 언론’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뜨거운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