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이 다른 언론사들끼리의 논쟁이 부담스럽다면, 의제설정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팩트체크 협업과 더불어 정기적인 좌담 형식의 의견 교환은 어떨까? 상호 소통 채널을 만들지 않은 채 확신에 찬 고함만 외쳐대는 건 나라를 두개로 찢는 민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심리학자들은 조직에서 사람들이 가능한 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성향과 버릇을 갖는 걸 가리켜 ‘커버링’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영국 언론인 마거릿 헤퍼넌은 ‘사소한 결정이 회사를 바꾼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출근과 동시에 우리는 자기 성격, 가치관, 감정의 튀는 면을
무던하게 보이기 위해 숨긴다. 그러나 숨기고 회피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반면, 정작 머릿속 아이디어는 꺼내지 못하고 안으로 가둬버린다.”
한국의 직장도 다르지 않을 게다. 논쟁은 직장에서만 억압당하는 게 아니다. 논쟁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논쟁은 쓸모가 없다거나 해롭다고 보는 ‘논쟁 무용론’은 사실상 일상적 상식으로 자리잡은 게 아닐까? 그간 제기된 논쟁 무용론의 이유 몇가지를 슬로건의 형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돼지와 씨름하지 말라. 이건 서양 속담이지만, 우리 속담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돼지와 씨름을 하면 둘 다 더러워지는데 돼지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돼지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둘째, 인간의 품성은 사악하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상대의 수준이 어떠하건 인간이라는 종족의 품성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에 논쟁을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릴 수는 없다고 했다. 자신의 과오나 부족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적을 만들어 좋을 게 없다. 주로 처세술 전문가들이 내세우는 이유다. 데일 카네기는 “방울뱀이나 지진을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고 했다. 논쟁에서 지면 화가 나고, 이기면 상대가 화를 내면서 원한을 품기 때문이다.
넷째, 논쟁을 선동의 도구로 쓰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말라. 논쟁 자체엔 뜻이 없는 선동가와 진지한 논쟁을 하려 드는 것은 지는 게임이다. 캐나다 철학자 조지프 히스는 선동가와의 논쟁은 코미디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다른 의견을 무시해야 행동할 수 있다. 미국의 행동파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는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한다.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다섯가지 이유는 모두 논쟁에 대해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논쟁은 필요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논쟁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배운 학습 효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공적 논쟁은 지지할망정 사적 논쟁은 거부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할망정 자신은 결코 논쟁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논쟁 무용론은 사실 케케묵은 이야기다. 미디어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론장의 역할을 했을 땐 논쟁의 공적 가치가 인정받았지만,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개인 미디어’의 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논쟁은 ‘마이웨이’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퇴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미디어마저 점점 팬덤산업에 편입되면서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동시에 고객이 불편하게 생각할 다른 목소리를 차단하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니 고객이 알아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면서 언론은 그 선택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보루라 해도 좋을 언론이 그런 흐름에 휩쓸리는 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제 언론은 논쟁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아예 경멸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색깔이 다른 언론사들 간 최소한의 소통마저 단절된 가운데 각자 자기 팬덤에 충실한 정보와 주장만 공급하기에 바쁘다. 한땐 색깔이 다른 신문과 사설을 교환해 싣는 등 소통하려는 자세는 있었건만, 이젠 그마저 사라져버렸다.
진보와 보수가 추상적인 이념이 달라서 각자 마이웨이로 치닫는 건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모든 이슈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사실 확인이 필요한 것들이 더 많다. 기존의 팩트체크론 안 된다. 팩트체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팩트체크의 의제설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색깔이 다른 언론사들끼리의 논쟁이 부담스럽다면, 의제설정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팩트체크 협업과 더불어 정기적인 좌담 형식의 의견 교환은 어떨까? 어떤 식으로건 상호 소통하는 채널을 만들지 않은 채 각자 광야에 선 선지자들처럼 확신에 찬 고함만 외쳐대는 건 나라를 두개로 찢는 민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