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은 꽉 짜인 논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끝없이 바뀌는 경험으로 세상을 익힌다. 경험은 수많은 사례를 만난다는 뜻. ‘어머니’라는 말도 ‘여성’, ‘성인’, ‘부모’, ‘자식’과 같은 논리적 속성을 합산한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익히는 게 아니다.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분과 옆집에서 본 비슷한 분,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른, 어떤 것의 시초 등을 보면서 눈덩이 굴리듯 ‘어머니’의 뜻을 넓혀 나간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 낳기만 하고 기르지는 않은 어머니, 낳지는 않았지만 길러준 어머니, 친밀감의 표시로 타인에게 던지는 어머니, 음악의 어머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등등. 전형적인 어머니에서 주변적인 어머니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이렇듯 우리 머릿속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어지는 원들로 가득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언어적 장치가 조사 ‘-도’이다. ‘너도 같이 가자!’처럼 ‘-도’는 어떤 것을 이미 있는 것에 포함시키는 포용의 장치이다. 그런데 이 포용의 장치는 무엇이 포함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세계가 중심과 주변,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뉘어 있음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여성도 할 수 있다’, ‘노인도 일하고 싶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있다’ 같은 말은 우리가 특정 범주의 가장자리에 누구를 배치해 왔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도’가 그어놓은 선 안쪽으로 대상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경계선 밖으로 빠져나가는 나머지들이 반드시 있다. ‘나머지’(주변과 잉여)를 줄여나가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치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