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5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파르나스에서 열린 제54회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 기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현 | 논설위원
일요일 저녁 티브이를 틀자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하는 장면이 나왔다.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관계 장관 대책회의에서 초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조직적으로 불법과 폭력을 행사하는 세력과는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장관들께서는 이러한 불법 행위에 대해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서 끝까지 추적하고 신속 엄정하게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만 ‘불법’과 ‘폭력’이란 단어를 각각 일곱차례와 네차례 언급하고,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발언을 두차례 했다. 마치 1980년대 티브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발언만으로 그때를 떠올린 건 아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누적됐기 때문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10·29 참사 이튿날 사고 책임을 묻는 질문에 “서울 시내 곳곳에 소요와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경비 병력이 분산됐다”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80년대 내무부 장관이나 치안본부장의 말을 연상시키는 발언들이었다.
이런 일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문화방송>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거부, 전 정권과 제1야당 주요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 등등. 이제는 노조의 파업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범죄시하는 발언까지 나왔다.
또한 노동자들의 생계·안전 문제가 걸린 파업을, 우리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국가안보 문제인 ‘북핵 위협’에 빗대 원칙적 대응을 주문한 것도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정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처벌을 위협하며 찍어누르려는 모습만 보인다.
오죽하면 국제노동기구(ILO)가 정부에 서한까지 보내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다며 형사 제재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나섰을까. 한달 전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눈 떠보니 후진국’이란 칼럼을 썼는데 그사이 ‘노동 후진국’이란 꼬리표까지 달게 됐다.
권부 핵심이 지금 치안, 언론, 노동,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벌이는 일들은 우리 사회가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30여년 간 힘겹게 일궈온 노력들을 수포로 되돌릴 수 있는 징후들이다. 사용하는 언어와 법 집행 방식이 조금 세련됐을지 모른다. 그건 먹물을 조금 더 먹고, ‘총’ 대신 ‘법’을 만지는 이들로 권부 핵심이 구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비슷하다. 적이냐 아니냐를 판단 잣대로 삼는 군인들처럼 검사 출신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이를 제어해야 할 여당은 한술 더 뜬다. 여당 지도부에선 민주노총을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주장하며 군부독재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용공 프레임’까지 덧씌우려 한다.
80년대식 국정 운영 방식은 경제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물가를 잡는다며 가격 통제를 하는 게 대표적이다. 올해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는데도 전기요금을 제때 올리지 않아 한전은 무려 30조원이 넘는 적자에 빠질 처지다. 전 정권에서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으나,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적자 규모(지난해 5조8천억원)가 커졌다. 운영자금이 부족해진 한전이 공사채(한전채)를 발행해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쓸어가자 채권금리가 급등해 금융시장까지 요동을 쳤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회생절차 신청 때처럼 정부는 쉬쉬하며 봉합하는 데 급급하다 문제를 더 키웠다. 이는 가뜩이나 고금리에 허덕이는 가계와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조밀하게 얽혀 있는 자본주의 경제 생태계에서 정부가 가격 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반드시 사달이 나게 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관계장관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전두환 정권이 물가를 잡은 것을 치적으로 자랑하곤 했는데, 그건 당시 우리 경제 규모가 작았을 때 얘기다. G-10이 된 지금 정부가 가격 통제 방식으로 물가를 제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오히려 큰 후유증을 남길 공산이 크다. 만약 자금시장 불안이 확산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대거 부실화하면, 그 영향은 제2금융권은 물론 은행에까지 파급될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을 둘러싼 모피아(재정·금융관료)들은 이런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생중계된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봤듯이 관료들은 실적 자랑을 하거나 규제완화만 쏟아냈다. 지금의 ‘예스맨’식 관료들로는 엄중한 시기를 헤쳐나가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지난 6개월간 현 정부의 실력은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국정 난맥상을 방치하기엔 국내외 상황이 너무나 엄혹하다. ‘법대로’를 외치며 윽박지르고 통제하고,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21세기 한국 사회를 이끌 수 없다. 윤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헌법에도 규정돼 있고 스스로도 공약했던 ‘책임총리제’의 이행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여야 모두가 인정할 만한 총리를 새로 선출해 경제·사회 주요 현안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