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0월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74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희철 | 논설위원
정치의 세계에는 늘 맞수 혹은 정적이 있다. 우리 정치사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있다면, 영국에선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을 꼽는다. 나라와 시대, 신념과 족적은 달라도 대립과 경쟁을 통해 정치와 사회의 생산적 발전을 이끈 사람들로 평가받는다.
지금 우리 정치를 규정하는 사람은 윤석열과 이재명이다. 둘은 대립하는 양 진영의 수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언행은 기이할 정도로 서로를 빼닮았다.
이재명 대표는 얼마 전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건너뛰었다. 민주당에서 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당은 해마다 수백억 국민 세금을 보조금으로 받아 쓴다. 무엇보다 국회 절대다수 의석(169석·전체 의석의 56%)을 차지한 지배 정당이다. 국민을 대신한 언론의 질문을 받는 건 의무나 마찬가지다. 회견을 거른 이유라는 ‘사법 리스크’는 그가 답해야 할 질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하긴 했다. 그러나 60분이 채 안 되는 회견 시간의 37%를 혼자서 말하는 데 썼다. 질문 시간과 기회는 무성의하게 짧았고, 성긴 답변은 종종 질문 취지와 어긋났다. 일방적인 국정 보고대회 같다는 평이 많았다. 취임 6개월 회견은 건너뛰었다. 취임 뒤 대표적 치적으로 자랑삼던 출근길 ‘약식 회견’(도어스테핑)은 어느 날 돌연 중단했다.
둘 다 사과할 줄 모른다. 잘못의 인정은 책임 정치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가볍게 무시한다. 대통령은 나라가 시끌시끌했던 비속어 논란 때 사과의 말 대신 성을 냈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고개 숙이지 않았다. 후보 시절 전두환 옹호성 발언이 논란이 되자 반려견 입에 사과를 대신 물려 내보내기도 했으니, 일관성 하나는 뚜렷하다. 인사 잘못으로 낙마한 장관과 후보자가 줄을 이어도 자신은 무관한 것처럼 행동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과해야 할 때 회피하지 않았다.
이 대표 스스로 “분신 같다”던 사람 둘이 ‘대장동 개발’ 비리로 잇따라 구속기소됐다. 억대 금품을 받았다는 혐의다. 대선자금 얘기도 나왔다. 국민은 의아해하고, 그 당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하지만 흔한 유감 표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실 여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말은 합리적 설명이 아니라 ‘소설’, ‘조작’, ‘야당 파괴’ 같은, 맥락을 소거한 매도의 언어뿐이다.
“제가 감독·관리해야 하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조달하고 사용한 대선자금은 저의 손발로서 한 것입니다. 법적인 처벌은 그들이 받되 정치적 비난은 저에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대표가 존경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측근들이 구속기소되자 ‘현직 대통령’인데도 머리를 조아렸다.
법조인인 윤석열과 이재명은 각자의 세계에서 제왕 노릇을 하다 의회 경험이 없거나 짧은 채로 지금의 권좌에 올랐다. 검찰총장이 검사들의 왕이라면 도지사는 해당 지역 황제나 다름없다. 몸에 밴 통보, 결행, 지배 대신 타협, 양보, 공존을 익힐 기회가 이들에겐 없었다. 그래서 둘 다 군림하려 들 뿐 정치는 하지 않는다.
불통과 무례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특징의 일부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을 과신하고, 자기 판단대로 밀어붙인다.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는 배척 대상이다. 소수 극렬 지지층만 의식하고, 다수 국민의 공감과 통합엔 무관심하다. 막스 베버의 언어를 빌리면, ‘책임윤리’는 외면한 채 각자의 ‘신념윤리’만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 써본 사람만 중용한다. ‘민생’은 정치적 구호로 동원할 뿐 정책으로 추진할 의지가 없고, 그러니 성과도 없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까지 똑같다. 33% 지지도와 31% 호감도(한국갤럽, 지난 9일치)는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민주화 이후 이토록 격렬한 ‘적대적 공생’은 처음 본다. 저차원의 정치공학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복’인 셈이다. 그러나 그사이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정치의 요소, 좋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당연시하던 규범과 문법들이 하나둘 파괴되고 있다. 거창하게 민주주의를 찾을 것도 없이, 국민을 대하는 예의와 염치부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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