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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청승맞은 미학은 쓸모도 많지 [아침햇발]

등록 2022-12-15 15:17수정 2022-12-15 19:52

연극 <등장인물>에서 중증 장애인들과 조력자들, 전문 연기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등장인물>에서 중증 장애인들과 조력자들, 전문 연기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서울시극단 제공

안영춘 | 논설위원

영화 <코다>(2021)를 볼 때마다 나는 특정 장면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비치고 만다.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난 청인 루비 로시(에밀리아 존스)가 오디션에서 노래를 부른다. 처음엔 음성언어로 시작하지만, 손가락이 미세하게 달싹이더니 이내 새가 날개를 펴 창공을 날듯 수어로 ‘일인 이중창’을 하는 시퀀스다. 루비가 제 손동작을 애틋한 눈빛으로 좇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눈길에 이끌리다 금세 수어의 선율에 몸을 맡기게 된다. 루비의 수어는 음성의 번역본이 아닐뿐더러 애초 둘은 하나였던 듯 숨 막히는 앙상블을 이루고, 그 미학적 전율은 수어 한마디 못 하는 내 몸속으로 오롯이 흘러든다.

지난달 연극 <등장인물>(서울시극단)을 보러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 갔다. 출연진은 전문 연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중증 발달장애인들과 조력자들도 제가끔 배역을 맡았다. 초반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매끄럽지 못한 장애인들한테서 긴장된 거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머잖아 공연의 열기 속으로 깊이 빨려들었고, 장애인들이 돌아가며 전문 연기자나 조력자와 짝을 이뤄 춤을 출 때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고 말았다.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에 앉은 장애인과 두 다리로 선 비장애 연기자가 손잡고 수없이 원을 그리며 도는 춤은 흡사 황홀한 아이스댄싱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둘 다 나만의 청승맞은 미학일지 모른다. 작품 완성도가 그 망연한 눈물의 진원지일 리도 없다. <등장인물>은 매번 장면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연출의 개입으로 완성도를 높일 여지는 크지 않고, 연출이 부재한 자리를 채운 건 중증 발달장애인의 예측 불가능한 ‘표출’이었을 터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아름다움은 규범적인 꾸밈이 아니다. 출연자와 관객 각자의 고유함이 서로 오가며 일으키는 관계 형성의 사건이다. 그 관계마저 개별적일지라도, 마침내 큰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다. 나는 홀로 눈물지었으나, 두 작품은 이미 보편적인 미학의 너른 지평 위에 서 있었다.

두달 전 작고한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사유를 빌리면, 개별성들이 교차하는 자리에 ‘로컬’이 형성된다. 로컬은 중앙집중에서 벗어난 상호의존의 사슬이자, 글로벌의 간접성이 도달할 수 없는 직접성의 영토다. 이런 관계의 주체들은 더는 이방인일 수 없다. 서로 연루되고, 관여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한다.(<나는 어디에 있는가?> 참조) 왜 하필 힘듦이고 아픔일까. 약한 존재들의 외모가 울퉁불퉁하고 촉수도 매끄럽지 않아서다. 그건 저 로컬한 두 예술의 본디 모습이기도 할 터이다. 루비의 음성 노래와 수어 노래, 중증 발달장애인과 비장애 연기자와 관객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들고 아프다.

로컬은 물리적 거리와 전연 무관하다. 단식 농성하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폭식 투쟁’하는 일베의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미터였으나 실상은 안드로메다보다 멀었다. 며칠 전 경남 창원시의회 의원 하나가 이태원 희생자 가족들을 겨냥해 차마 옮기지 못할 혐오발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창원과 이태원이 지구 반대편만큼 멀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저토록 무도할까 개탄하다가도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타자의 힘듦과 아픔을 감응과 애착으로 건네받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건 자신의 아픔조차 스스로 아파하지 못할 만큼 의식이 마비되고 식민화돼버린 탓이다.

윤석열 정권의 ‘법과 원칙’은 약한 존재만 색출해 공격하는 주술로 둔갑했고, 이를 내면화한 이들은 현실을 힘들어하거나 아파하기는커녕 혐오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 이태원 희생자와 가족, 화물차 노동자 등에 대한 가해는 기후위기와 함께 무차별로 멸종 중인 생태계로도 연장된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그들 모두 ‘인류세’에 연루된 약자다. 저항의 방식은 달라야 한다. 그들의 힘듦과 아픔을 머리로만 알고 감각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시선을 가해 권력에 고정한 채 인간·비인간 피해자에게까지 촉수를 연결할 수 없다. 그 종착지가 바로 진영논리다.

현실은 갈수록 로컬적 예술을 강하게 요청한다. 참고로 <등장인물>의 장애인들과 조력자들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과 장애인 야학 동문이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예술과 투쟁의 변증법의 실험극을 펼치고 있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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