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1998년 10월8일 일본 도쿄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이날 양국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특파원 칼럼] 김소연 | 도쿄 특파원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놓고 정부가 오는 12일 공개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해법 마련을 위한 마지막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유력한 안’은 나와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일본 기업 대신 피해자들에게 먼저 보상을 하는 안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 자금을 지원받았던 포스코 등이 돈을 낼 기업으로 거론된다. 한국 재판에서 15년 이상 걸려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받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다. ‘병존적 채무 인수’(채권자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제3자가 채무자와 약정을 맺고 일단 채무를 변제하는 것)라는 방식을 이용해 이를 막을 예정이다.
윤석열 정부가 꽉 막혀 있던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선 것은 잘한 일이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에 워낙 완강한 탓에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렵고 힘든 협상이지만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일본의 사과와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 그리고 피해자들의 동의가 그것이다. 이런 내용이 빠진 ‘유력안’에 피해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 스스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이를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중 대립이 격화되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일 안보협력의 중요성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한-일 안보협력은 대만 해협과 한반도라는 두개의 위협을 마주한 일본도 절박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이 새해를 맞아 특정 언론사와 한 인터뷰를 보고 조금은 의문이 풀렸다.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일본이 여전히 강경하지만 징용 문제, 특히 일본 기업에 대한 현금화 문제만 해결되면 양국 정상 상호 방문을 통해 다방면에 걸친 한-일 관계 정상화에 물꼬를 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문제를 한-일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쯤으로 생각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 한-일 관계 개선과 관련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강조하며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겠다’고 공약했고, 8·15 경축사 등을 통해서도 이런 뜻을 밝혀왔다. 이 선언은 1998년 10월8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김대중(1924~2009)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1937~2000) 일본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말한다. 5개 분야 협력 원칙을 포함한 11개 항으로 이뤄져 있다. 2항엔 오부치 총리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가 명기됐다.
김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 공동선언은 많은 원칙과 구체적 행동 계획을 담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총리의 대한국 사죄”라며 “나는 일본이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미래를 보라고 조언했다. 그것은 과거를 직시해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더 나은 한-일 관계를 위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해나가자’며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이 공동선언의 핵심 정신이다. 윤 대통령의 강제동원 문제 접근 방식을 보면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읽어보긴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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