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나는 어지럼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은 채 코에 걸린 안경을 빼 탁자에 올렸더니 뭔가에 부딪혔다. 거기 자리잡고 있던 안경들이 서로의 다리를 걸고 엉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 지금의 내 꼴 같았다.
며칠 전 안경점에 갔다. 지난번에 맞춘 안경 도수가 너무 높아서인지 책이나 휴대전화를 보기 어려웠던 거다. “너무 선명하지 않아도 되고요. 가까운 데나 먼 데나 적당히만 보이게 해주세요.”
안경사가 내 나이를 묻더니 빙긋이 웃었다. “그러려면 다초점렌즈를 쓰셔야 합니다.” ‘노안’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뜻은 알아챘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 “가까운 곳만 확실히 볼 수 있는 렌즈로 해주세요.” 두개를 바꿔쓰면 그게 다초점이잖아. 그러곤 두 안경에 옛날 안경까지 번갈아 쓰다 멀미라도 난 듯 쓰러졌다.
꿈을 꾸었나? 여러 안경들이 놀리듯 춤추는데 내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렌즈 좀 추천해 주세요.” 이십대의 내가 수동카메라(SLR)를 장만해 자주 뵙던 사진가를 찾아갔다. “먼저 사람 눈에 가까운 표준 렌즈로 충분히 찍어봐요. 그 다음엔 전혀 다른 단렌즈 두개를 써봐요. 당분간 줌은 쓰지 말고요.” 왜일까? 비싸더라도 줌이 더 간편한데? 의문은 있었지만 술자리에서 똑딱이로도 화보 사진을 찍어내는 분이니 믿기로 했다.
재미있었다. 렌즈를 바꾸면 화각과 심도가 달라지고, 눈에 담기는 세상의 폭이 달라졌다. 똑같은 거리의 고양이도 전혀 다른 생명체가 되었다. 하지만 불편했다. 특히 여행이나 출장 때 무거운 렌즈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며 바꿔 끼우는 일이 번거로웠다. 결국 무난한 줌렌즈를 장만했고 거기에 길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사진가가 내 필름을 보았다. “사진은 사람을 닮죠. 명석씨는 이런 사람이에요.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하며 가끔 줌으로 당겨보죠.”
1977년 찰리 채플린이 죽은 직후 <가디언>이 그의 말을 전했다.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고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다.” 나는 무난하기 그지없는 렌즈로 인생을 당겼다 밀었다 하며 희비극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사진가의 말을 달리 하면 이렇다. “줌을 당기지 말고 당신이 다가가세요.” 그러나 나는 세상의 참담함이나 인간의 치졸함을 가까이에서 볼 용기가 없었다. 서로 다른 렌즈로 목격한 삶의 울퉁불퉁한 모습을 하나로 이해할 자신도 없었다.
멀지 않은 때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두 화가가 한 도시를 그린 전시의 해설문을 부탁받았다. 그리고 그림들에 투영된 다채로운 시점에 놀랐다. 사진이나 영화는 다양한 렌즈를 써도, 어땠든 한 장면의 시점은 통일돼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는 서로 다른 소실점을 가진 여러 시선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조합된다. 어떤 그림에선 수십명 사람들이 실제의 원근을 무시하고 거의 같은 크기로 나오는 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모든 걸 맨눈으로 매끈하게 보던 자유는 오래전에 떠났다. 안경 하나로 버틸 수 있던 시간도 지나갔다. 이제는 여러 안경이 보여주는 울퉁불퉁한 세계를 조합하며 살아야 한다. 완벽히 익히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얻어온 지혜들은 있다. 사진가는 다양한 렌즈를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화가는 여러 시점의 관찰을 하나의 장면으로 재조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기대한다. 어쩌면 이 핸디캡이 내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고.
나는 일어나 각각의 안경알이 가장 잘 보여주는 거리를 검토했다. 하나는 책을 읽기에 좋고, 하나는 텔레비전을 보기에 좋고, 안경을 벗으면 휴대전화를 보기에 좋다. 나는 책 읽는 안경을 집어든다. 이 안경을 끼면 텔레비전과 휴대전화는 사라지고 서재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