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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파종달력 이야기

등록 2023-01-26 19:21수정 2023-01-27 02:33

‘2023 생명역동농업 파종달력’. 원혜덕 제공
‘2023 생명역동농업 파종달력’. 원혜덕 제공

[삶의 창]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농사는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더 들어가면 땅부터 갈고, 작물을 기를 거름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하지만, 그냥 농사의 시작은 봄에 씨를 땅속에 심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같은 봄이라도 추위에 강한 배추나 상추 같은 잎채소는 4월 초나 중순에, 고추나 오이, 토마토 등 열매채소는 기온이 충분히 오른 5월 초순에 심는다. 귀농한 사람들이 처음에 잘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봄에 날 풀렸다고 안심하고 일찍 심어 싹이나 어린 모종을 늦추위에 얼어 죽게 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복숭아꽃이 필 때 참외 씨를 넣어라, 뻐꾸기 울 때 들깨 모를 부어라, 하는 것은 작물마다 심을 적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농장에는 작물을 심는 기준이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어떤 씨를 뿌리는 것이 작물에 좋은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작물을 종류마다 기온에 맞춰 때를 다르게 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때는 20년쯤 전이다.

작물은 잎을 먹는 엽채류, 뿌리를 먹는 근채류, 열매를 먹는 과채류, 꽃을 먹는 화채류, 이렇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유형의 작물을 각각 어느 날 심어야 잘 자라고 수확량이 많아지는지 알려주는 달력이 있다. 독일의 마리아 툰이 수십 년 동안 실험과 관찰을 통해 황도상의 12 별자리가 각각 다른 날에 잎, 뿌리, 열매, 꽃에 강한 자극을 줘 작물이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을 알아내어 만든 달력이다. 파종달력이 알려주는 날짜에 따라 작물을 심거나 가꾸면 수확량이 많아지고, 그 작물이 가진 유전적 특성이 다음 세대에 잘 전달된다. 유기농의 한 종류로 독일에서 시작된 ‘생명역동농업’이 도입된 나라들, 곧 유럽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마리아 툰이 밝혀낸 원리에 따라 파종달력을 만들거나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2023 생명역동농업 파종달력’ 속지와 독일의 마리아 툰이 만든 파종달력. 원혜덕 제공
‘2023 생명역동농업 파종달력’ 속지와 독일의 마리아 툰이 만든 파종달력. 원혜덕 제공

남편이 마리아 툰에게 판권을 얻어 이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지 올해로 15년째가 됐다. 해마다 원본 번역을 맡기고 8시간 시차를 조정해 만들었다. 그러다 7년 전 남편은 벽걸이 달력을 만들겠다고 했다. 책자와 달리 벽에 걸어놓는 달력은 그날그날 아무 때나 바로 볼 수 있어 많이들 활용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나 본래의 책자 형태의 달력은 번역과 시차만 적용하면 되지만 벽걸이 달력으로 만들려면 신경 쓸 일이 많다. 파종달력의 내용을 잘 담되 1년 내 벽에 걸려있을 테니 예쁘고 품위 있게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안 나는 일이라 나는 옆에서 구경만 했다. 실제 무얼 참견할지도 몰랐다. 남편은 지인에게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받아 생명역동농업 내용에 맞는 매달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 밖의 일을 하나씩 해나가더니 드디어 첫 번째 벽걸이 달력을 완성했다. 이듬해부터는 나도 발 벗고 나섰다. 보기 좋은 달력을 만드는 일은 아무래도 내가 나을 것 같아서였다. 파종달력은 농사짓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냥 벽에 걸어놓기만 해도 농사에 참여하는 것 같아 기분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얼추 마무리되면 남편과 나는 파종달력 만들기에 집중한다. 12월이 되면 ‘우리 집은 기승전파종달력’이라고 나는 말한다. 올해 파종달력은 지난해 독일에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우리도 늦게 만들기 시작했다. 설 전에 겨우 완성해 주문한 사람들에게 부쳤다.

고추는 이달 말에 씨를 넣어야 석 달 뒤인 5월 초에 밭에 나갈 수 있다. 파종달력을 보니 1월29일이 ‘열매의 날’이다. 우리는 그날 고추 모를 부을 것이다. 석 달 뒤 열매의 날을 다시 찾아보니 4월29일부터 5월1일까지 사흘간이다. 그때 우리는 고추를 밭에 내다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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