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국적 이주노동자가 한파 경보가 내려진 지난 2020년 12월20일 경기 포천시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2020년 12월23일 오후 숨진 노동자가 일하던 비닐하우스와 숙소에서 포천 이주노동자상담센터 대표 김달성 평안교회 목사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날 농장 대표는 기자들이 찾아오자 경찰을 불러 취재진의 접근을 막았다. 포천/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미국인 국제변호사로 한국 대학에서 일하는 먼디는 아내, 자녀 9명과 산다. 엠비시에브리데이 <어서와 한국살이는 처음이지>는 막내 돌잔치를 다뤘다. 가족은 함께 조깅하고 아침상을 차린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스페인 사람 알레한드로는 인도네시아인 아내와 한국에 산다. 호텔 총지배인인 그의 집은 아내의 취향에 따라 알록달록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이들이 가족과 사는 건 당연하다.
네팔에서 옥수수 농사를 했던 선데스(30)는 2016년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와 프레스 공장에서 일한다.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4년10개월 일한 뒤 출국했다 사장이 성실근로자로 인정하면 한국으로 돌아와 4년10개월 더 일할 수 있다. 선데스는 성실근로자로 7개월 전 한국에 다시 왔다. 그는 9년8개월 한국에서 일할 수 있지만 2015년 결혼한 아내는 함께 올 수 없다.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선데스 같은 노동자가 한국에 눌러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아내가 그를 방문하려면 관광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이 또한 사장의 보증이 필요하다. 그는 네팔에 다녀올 수 있을 만큼 휴가를 얻을 수도 없다.
지난해 말 정부는 고용허가제 개편안을 내놨다. 중소기업이나 농어촌에서 일손이 부족하다 아우성쳤기 때문이지 이주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개편안을 보면, 고용허가제로 온 이주노동자가 ‘준 숙련 인력’으로 인정받으면 중간에 출국하지 않고 한국에서 10년 이상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 살 권리는 없다. 가족결합권은 유엔이 보장하는 인권이지만 한국에서 선데스는 ‘노동력’이지 ‘사람’이 아니다.
선데스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공장에서는 그를 포함해 네팔인 3명과 사장이 일했다. 그새 공장 규모가 커져 지금은 네팔 노동자가 5명, 한국 노동자가 5~6명이다. 그의 임금은 그간 30만원 올랐다. 공장을 “함께 키웠다”고 생각하는 그는 공장 옆 컨테이너에 산다. 난방시설과 부엌이 생긴 건 대여섯 달 전이다. 성실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할까봐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봤다. 묵묵히 하루 할당량인 경첩 8천개를 채웠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5년 동안 못했던 말을 했다. 할당량이 과하다. 사장은 보름째 일을 주지 않았다. 그 기간엔 임금도 없다. ‘괘씸죄’다. 사업장을 옮기고 싶지만 그러려면 사장 동의가 필요하다. 해줄 리 없다. 고용허가제가 ‘현대판 노예제’라고 비판받는 까닭이다. 사장의 화가 풀리길 기다리는 그는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상황은 농촌 이주노동자들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월급을 뜯기지 않으니까. 우춘희가 쓴 <깻잎 투쟁기>를 보면, 농촌 이주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일하고 8시간어치 임금만 받는다. 노동자들이 이탈할까봐 일부러 임금을 체불한다. 캄보디아인 쓰레이응은 체불임금 6천만원을 못 받고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알선한 일자리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2020년 이주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체불임금은 1287억원이다. 2020년 캄보디아인 속헹은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졌다. 이런 비닐하우스 숙소 비용은 사람당 15~20만원이다. 이후 정부는 비닐하우스 안 컨테이너 숙소는 금지했는데 비닐하우스 밖에 있는 컨테이너는 ‘임시숙소’로 허용해줬다.
정부는 고용허가제 노동자 규모를 지난해 6만9천명에서 올해 11만명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고용허가제 개편안에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일 시킬지에 관한 얘기만 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정한 9대 핵심 조약 중 하나가 ‘이주노동자권리협약’인데, 한국은 9개 중 이 조약만 빼고 비준했다. 이주노동자 없이는 밥상도 차릴 수 없는 한국인의 일상은 인종주의적 착취 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