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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달리거나 매달리거나

등록 2023-02-16 18:28수정 2023-02-17 02:06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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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언젠가 머나먼 남도의 초상집을 찾아가는 문인들의 차에 동승했다. 전주에서 잠시 쉴 겸 한정식집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2층으로 된 거나한 상을 내왔다. 그런데 어느 소설가가 재빨리 접시들을 골라 바닥에 내려놓는 게 아닌가. “어차피 안 먹을 거니까. 시간도 없고.”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이봐요. 어떤 독자가 당신 소설의 야한 부분만 골라 읽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로부터 한참 뒤 나는 이런 대화 속에 있다. “요즘엔 넷플릭스를 1.5배속으로 본대요. 대사는 자막으로 따라가고요.” “그 정도면 다행이죠. 유튜브에서 영화나 드라마 요약본이 얼마나 인기인데요? 조회수 몇십만을 찍어요.” “우리 애는 애니메이션을 액션 장면만 봐요. 줄거리는 블로그 같은 데서 읽고.” “말세야. 감독은 장면 하나 넣을지 말지 0.1초 단위로 결정하는데.”

잠자코 듣던 내가 무심결에 말했다. “그게 그렇게 새로운 일인가요? 책도 그렇잖아요. 묘사는 건너 뛰고 대사만 읽는다든지. 빠르게 넘기며 핵심만 찾는다든지.” 잠깐의 침묵 뒤에 격앙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려면 책을 읽지 말아야죠. 듣기만 해도 속이 쓰리네.” “작가란 분이 입에 올릴 말은 아니죠.” “행간의 뜻, 숨은 의도 같은 건 상상도 못하겠네요.” 나는 욕을 먹고도 항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아직도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구나.

이야기 예술은 감상의 시간을 독자들이 임의로 조절하는 매체와 아닌 매체로 나뉜다. 소설, 만화는 사람에 따라 읽는 시간이 천차만별이다. 훑어보기와 건너뛰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 영화, 드라마는 정속의 상영시간을 지키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제 이런 매체들까지 배속과 요약본으로 듬성듬성 즐긴다니. ‘문화 말세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완전한 감상’의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왜 굳이 그렇게 볼까? 나의 추측으론 이렇다. 첫째, 같은 월정액으로 오티티(OTT·온라인 동영상서비스)를 이용한다면 하나라도 더 봐야 이득이다. 둘째, 사람들 입에 오르는 작품은 어떻게든 감상해야 대화에 낄 수 있다. 그런 화제작들이 너무 많고 싸다. 셋째, 여가시간이 짧으니 긴 작품을 천천히 즐길 여유가 없다. 넷째, 혼자 보니까. 빨리 보든, 건너 뛰든 내 마음이다.

지난해 내가 멘토 역할을 하며 만난 기자와 크리에이터 청년들이 떠올랐다. 면접 때 이야기를 나누니 다들 경력도 좋고 의욕이 넘쳤다. 지방에서 오면 차비도 남지 않을 일인데, 꼭 하고 싶다며 다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일정이 시작되자 결석도 잦고 여러 핑계로 마감을 미루는 일이 많았다. 찬찬히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다들 너무 바빴다. 이런 종류의 기자단, 봉사단 활동을 서너개씩 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했다. 어쩌면 이런 친구들은 공부, 경험, 드라마를 1.5배속으로 달리는 일조차 더디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경험은 뇌를 만든다. 삶이든 예술이든 진득하게 체험하며 그 과정을 즐기는 법을 훈련하지 못하면, 점점 짧고 새로운 자극만 갈망하게 된다. 어떤 이는 주말을 이용해 서울에 올라와 서너군데 ‘핫플’을 찍고, 돌아가는 케이티엑스(KTX)에서 스마트폰으로 화제의 드라마를 배속으로 주행한다. 그런 과정이 계속 되면 두시간짜리 영화, 공연, 어쩌면 데이트를 이어갈 집중력까지 잃어버릴지 모른다.

이 시대엔 정반대 사랑도 있다. 누군가는 모호한 이미지의 뮤직비디오를 백번씩 되돌려보며, 그 안의 상징들을 찾아내 숨겨진 세계관의 퍼즐을 맞춰간다. 영화와 뮤지컬을 ‘엔(n)차관람’하며 매번 새로운 재미를 얻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양극단으로 크게 갈라졌을 뿐. 과하게 하나에 매달리거나, 하루에도 열두번씩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내달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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