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가서 30년 만에 만난 사람들과 같이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계란과 시금치를 제외한 모든 재료는 필자가 한국에서 싸 가지고 갔다. 원혜덕 제공
[삶의 창]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지난 늦가을 크리스토프라는 독일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괴산에서 열린 세계 유기농대회에 초청받아 왔다가 대회가 끝난 후 한국에도 생명역동농업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회 본부에서 남편을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생명역동농업은 독일에서 시작된 유기농업의 한 형태다. 그는 생명역동농업 연합의 사무국장이다. 그때 내년이면 생명역동농업이 100년을 맞는다면서 올 2월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석하라고 권했다. 생명역동농업의 100년을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모임이라면서 우리 숙소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와 이야기하던 중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그의 농장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콘퍼런스가 끝나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자기 농장에 데리고 가서 보여 주겠다고 했다.
농장 일로 늘 바쁘고 너무도 먼 길이기에 남편과 나는 처음에는 엄두를 못 내다가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먼 길 떠날 마음을 먹게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1991년에 남편은 교환농부 프로그램으로 스위스 베른의 ‘뮌체미어’라는 마을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다. 여섯 농가에서 그들과 같이 일하면서 지냈다. 그때 남편과 가깝게 지내던 한 사람이 그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에 나를 초청해 주었다. 왕복 비행기표 값을 보내주었고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스위스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은 아이가 다섯이나 돼서 빈방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스위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 주었다. 나머지 기간에는 유레일 패스로 남편과 둘이서 밤에는 기차에서 자면서 이동하며 북쪽 스웨덴에서 남쪽 이탈리아까지 유명한 도시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보았다.
그 후 농사하며 살다 보니 3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부터 남편과 더 시간이 가기 전에 그곳에 다시 한 번 가 보자고 막연하게 이야기하던 중에 생명역동농업 콘퍼런스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바젤에 있는 생명역동농업 콘퍼런스에 참석한다면 베른에 있는 그 동네에도 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는데 기적같이 연락이 닿았다. 우리와 다시 만난다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뭉클했다. 모두 기다린다고 했다.
농업 콘퍼런스가 시작되기 3일 전에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취리히 공항에 내려 기차를 타고 베른을 거쳐 뮌체미어 마을에 도착했다. 30년 만에 만났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끌어안는 순간 그 세월은 사라져 버렸다. 첫날 저녁은 그 옛날에 나를 초청했던 수지가 식탁보를 예쁘게 깔고 음식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초청했다. 자기 뒤뜰에서 딴 열매로 파이도 구워놓았다. 이튿날은 아침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김밥 준비를 했다. 내가 김밥 준비를 해 갈 테니 점심으로 같이 해 먹자고 한국에서부터 말해놓았다. 계란과 시금치를 제외한 모든 재료는 내가 한국에서 싸 가지고 갔다. 미리 부탁해 놓았던 계란 다섯 알과 시금치 두 단을 우리가 도착하자 갖고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정작 먹는 것보다는 만난 큰 기쁨이 식탁에 넘쳐났다. 그날 저녁에는 남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여섯 가정이 모두 모여 저녁 만찬을 겸한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정상회담에서처럼 탁자에 스위스 국기와 태극기를 세워놓고 그 옆에 우리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환영한다고 써놓았다.
그 이튿날 기차역까지 배웅해주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들과 헤어져 기차를 타고 바젤로 떠났다. 바젤에서 열린 4일간의 생명역동농업 콘퍼런스, 그다음에 이어진 4일간의 생명역동농업 농장들 방문, 스위스와 독일을 넘나들며 이루어진 이 방문은 크리스토프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약속한 것보다 더 커졌다. 이 또한 가는 곳마다 만난 환대로 마음이 저리도록 따뜻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남편과 나를 위한 환영 저녁 만찬을 준비해주었다. 탁자 위에 스위스 국기를 세워놓고 그 옆에 우리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환영한다고 써놓았다. 원혜덕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