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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법 기술자들의 나라 / 박용현

등록 2023-02-26 15:20수정 2023-02-27 02:39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이 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현안 브리핑에서 국가수사본부장 검증 관련 대통령실의 입장 설명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이 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현안 브리핑에서 국가수사본부장 검증 관련 대통령실의 입장 설명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용현 | 논설위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전 검사가 지난 25일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낙마했다. 피해 학생이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니, 이 정도면 피해 학생에게 사죄하고 처벌을 달게 받도록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정 전 검사의 뇌리에는 ‘법’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그는 전학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재심과 행정소송, 가처분신청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에 피해 학생이 견뎌야 했던 2차적 고통은 어땠을까.

해당 고등학교 관계자의 증언이 기막히다. “대응하는 걸 딱 보니까 ‘아이고, 이게 프로구나’ 일반인은 생각도 못 할 그런 일들을 쭉 단계 단계로.”

이 말을 들으니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때 발언이 연상된다. “여러분이 만약 기소를 당해 법정에서 상당히 법률적으로 숙련된 검사를 만나서 몇년 동안 재판을 받고 결국 대법원에 가서 무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인생이 절단난다. 판사가 마지막에 무죄를 선고해서 여러분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형사법에 엄청나게 숙련된 검사와 법정에서 마주쳐야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다.”

생각할수록 섬뜩한 말이다. 비록 무죄가 예상되는 사건이라도 수사·기소·재판 등 법 절차를 통해 얼마든지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소기의 목적을 위해 숙련된 법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펼칠 수 있다는 검사로서의 ‘경험칙’이 엿보인다. 비록 전학 처분을 되돌리는 게 정의가 아닐지라도 끝까지 법적 다툼을 이어간 정 전 검사의 ‘프로’적인 태도 또한 이런 검찰의 속성이 발현된 게 아니었나 싶다.

기실 검찰이 법 기술을 동원하면 상식과 정반대의 세계가 현실로 펼쳐지곤 했으니 이런 태도가 무모하지만은 않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금지를 둘러싼 거대한 해프닝을 보자. 한밤에 외국으로 달아나려던 그를 긴급히 출국금지시킨 일은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검찰은 어느새 이를 희대의 권력남용·인권침해 사건으로 둔갑시켰다. 사소한 절차적 미비를 침소봉대해 압수수색·소환조사를 벌이며, 김 전 차관을 단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검사와 법무부 간부 등을 ‘죄인’으로 몰았다. 지난 15일 이들은 사실상 전부 무죄판결을 받았다.

윤미향 의원 사건은 어떤가. 검찰은 준사기 등 8개씩이나 혐의를 붙여 기소했지만 이 중 7개는 무죄판결이 났다. 유일하게 인정된 업무상 횡령도 검찰 기소 금액의 17% 정도만 인정됐다. 검찰은 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치매를 이용해 사실상 사기를 쳤다며 파렴치범으로 몰았지만, 법원은 치매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30년을 일해온 윤 의원의 삶은 부정됐고 함께 헌신했던 손영미 위안부 피해자 쉼터 소장은 압수수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법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죽음보다 힘겨운 고통을 받는다. 검찰이 만들어낸 ‘유죄의 가상현실’은 적어도 수사·기소·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 목표물들을 괴롭힌다. 이런 일은 의외로 많다. 2015년부터 2020년 6월까지 수사·기소 과정에서 구속됐다가 최종 무죄로 풀려난 사람이 905명이나 되는 사실은 그 한 단면이다.

윤 대통령은 앞의 발언 말미에 덧붙였다. “검찰의 기소라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기소하지 않고, 기소해야 될 사안을 봐주지 않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앞의 두 사건 모두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일 때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검찰을 장악하고, 다른 정부 요직에도 법 기술에 능숙한 검사 출신들을 대거 포진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으로 징계를 받았던 이시원 전 검사(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가 그중 한명이며, 정 전 검사 인사검증에 실패한 책임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정 전 검사는 사퇴를 밝히는 입장문에서도 “수사의 최종 목표는 유죄판결”이라는 말을 했다. 수사기관이 진실 발견이 아닌 유죄판결을 목표로 삼으면 침소봉대, 여론몰이, 심지어 조작 수사가 벌어진다. 그런 인식을 가진 인물이 경찰 수사의 총지휘자로 임명되지 않게 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또 어떤 자리에 어떤 법 기술자가 중용될지 알 수 없다. 검찰과 경찰이 또 어떤 법 기술을 발휘할지도 알 수 없다. 나라가 법 기술자들에게 포획됐으니 또 누가 숨죽여 고통을 견뎌야 할지 알 수 없다.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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