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언어모델에 대한 과도한 거품은 걷어내야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학창 시절 시험 전날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서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데이터를 머릿속에 입력했다가 시험시간에 출력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고, 이게 과연 개인의 암기력 이외에 어떤 능력을 평가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될 텐데’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뇌의 저장소를 통과한 정보들은 시험이 끝난 뒤에 금방 휘발됐다. 그게 과연 공부였을까.
미국의 글로벌 인공지능연구소 오픈에이아이(AI)가 개발한 인공지능 챗지피티(ChatGPT)가 열풍이다. 논문을 써내고, 정책을 만들고, 로스쿨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정도라고 한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여러 일자리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예견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자율주행 기술로 인해 수많은 운전사가 일자리를 잃고, 인공지능이 만든 그림을 보면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 했다. 챗지 피티 등장 이전에도 인공지능 관련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는 스토리텔링을 학습시키는 중이라며, 창작의 영역도 곧 대체될 거라고 했다.
챗지피티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한국어로는 아직 부족하지만 영어로는 무서운 수준이라는 게 주변의 평가다. ‘남녀노소 누구나 슬퍼할 시나리오를 써줘’라고 주문했더니,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과 그를 기차역에서 배웅하는 엄마의 눈물겨운 이별 장면을 순식간에 써낸다. 인공지능의 학습력은 무시무시해서 가족영화나 스릴러 등 주문한 스타일에 맞게 뚝딱 써낸다. 나는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이야기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질문을 던진 사람의 것일까?
대학생 때 시나리오 모니터링 아르바이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시나리오를 읽고 신(scene)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점수를 매기는 일이었다. 영화학도일 때는 그것이 창작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고도로 계산된 천편일률적인 영화만 나온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대중에게 효과적이라면 과연 나쁜 것일까, 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 내는 결과물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무서운 것은 흔히 우리가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라고 하는 것들조차 인공지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리란 것이다. 예를 들어 칸 영화제 수상작 스타일로, 아카데미 수상작 스타일로 주문할 수도 있겠다.
학창 시절 가장 절실했던 감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것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됐다. 그러나 기술이 더 발전해 인공지능이 쓴 글과 사람이 쓴 글의 구별이 불가능해진다면 어떨까? 인공지능이 내가 쓴 지난 칼럼과 소설들을 학습하면 비슷한 스타일의 글을 순식간에 완성할 것이다. 내 스마트폰의 지피에스(GPS) 정보와 인터넷 검색, 쇼핑 내역을 바탕으로 내가 생활하며 접한 것, 보고 들은 것을 분석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에스엔에스(SNS)에 뜨는 알고리즘 광고들을 보며 놀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느끼는 것이 뇌의 특정 신호라고 했을 때 그에 대한 패턴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별로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나보다 더 나다운 글을 완성하고, 심지어 더 잘 쓸 수도 있다.
결국 언젠가 우리는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주고 영화 <매트릭스>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친구와 농담을 나눴다. <매트릭스>에서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인공지능이 만든 자궁 안에 갇혀 가상세계에 살아가며 에너지원으로 사용당한다. 적절한 규제와 사용 윤리에 대한 논의가 시급해진 지금, 과연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은 무엇일까. 에스에프(SF)에서나 상상하던 물음이 생각보다 빨리 도래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