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대승적 결단이라고 포장하지 말자

등록 2023-03-16 18:34수정 2023-03-17 02:36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코즈모폴리턴] 조기원 | 국제뉴스팀장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 방안이라며 일본의 사과는 물론 가해 일본 기업의 기금 참여도 빠진 ‘제3자 변제 방안’을 내놓고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해결 방안을 “대승적”이라고 주장하고, 일본 언론은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상찬했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허망한 말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6일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을 대신해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을 받은 원고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발표하며 “높아진 국력과 국위에 걸맞은 우리의 주도적인 대승적인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박 장관과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과 질의응답 과정에서 “대승적 결단”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대승적”이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사로운 이익이나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정부가 전체적인 관점으로 중요시하는 큰일인 한-일 협력을 위해 작은 일로 보이는 일본의 사과나 일본 기업의 기금 참여는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문제의 본질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으로 인권침해를 당했던 개인의 피해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느냐이다. 2018년 가을 대법원이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이유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급격히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한 노력이나 필요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권침해 회복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가해자의 사과조차 빠진 해결안을 대승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한국 정부 해결안 발표 때 “1998년 10월에 발표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을 뿐, 피해자에 대한 사과 의사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은 가해 기업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날 “코멘트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마치 남의 일인 듯한 태도를 취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비롯한 일본 역대 내각의 담화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포괄적인 사과·반성이 담겼으니 담화 계승으로 사과는 충분하다고 보기에는 궁색하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하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올라섰으니 한국이 좀 더 양보할 수 있다는 식의 논의도 눈에 띄지만, 나라가 좀 더 부유해진 것과 개인이 받은 인권침해를 직접 관련지을 수 없으며 관련지어서도 안 된다. 강제동원 해결안 발표 다음날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일 간의 미래 지향적 협력은 한·일 양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 거대하지만 공허한 말로 문제를 외면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한·일 양국 정부는 16~17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청년 교류 등을 지원하는 미래청년기금(가칭) 조성, 한-일 경제협력 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미래’라는 아름다운 말이 대거 동원될 것으로 보이지만 강제동원 문제와 직접 관련은 없는 이런 사업들로 피고 일본 기업의 책임을 덮을 수는 없다.

garde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칼럼] 1.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칼럼]

[사설] 서울 도심서 2년째 열린 시대착오적 ‘군사 퍼레이드’ 2.

[사설] 서울 도심서 2년째 열린 시대착오적 ‘군사 퍼레이드’

여섯번째 대멸종이 올까 [강석기의 과학풍경] 3.

여섯번째 대멸종이 올까 [강석기의 과학풍경]

[사설] “대통령 사과했으니 국민이 이해하라”는 한 총리 4.

[사설] “대통령 사과했으니 국민이 이해하라”는 한 총리

프랑스 혁명 후, 분리된 ‘수사·기소’…“다 주면 폭군 나와” 5.

프랑스 혁명 후, 분리된 ‘수사·기소’…“다 주면 폭군 나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