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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록 2023-03-21 18:25수정 2023-03-22 02:36

시민의 출근길 잠시간의 불편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장애인이 겪어온 평생의 불편도 당연하지 않다. 시민의 불편과 장애인의 불편이 꼭 대립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돈을 쓰면 된다. (…) 한국의 장애인 예산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3분의 1에 그친다. 평균만큼만 써도 세상이 많이 달라진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장벽 앞에서 한번도 좌절해 보지 않았을 사람들끼리 “이만하면 꽤 나아진 것 아니냐”며 자찬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대학 시절 함께 어울려 지낸 친구 한명은 지체장애인이어서 목발을 짚고 다녔다. 친구를 만나고 노는 곳은 반드시 1층이어야 했다. 1층이라도 높은 턱이 있는 곳이 다반사인데다 화장실도 1층이어야 하니, 갈 수 있는 곳이 매우 적었다. 내 20여년 단골이 된 카페도 턱 없는 1층에 화장실이 가깝다는 이유로 친구가 찾아낸 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턱과 계단을 오르내려야 할 때가 수시로 닥쳤다. 우리가 단숨에 내딛는 거리가 친구에게는 힘들게 건너야 할 장벽이었다. 그와 다니면서 자연스레 알게 됐다. 세상이 온통 턱과 계단으로 가득하다는 걸. 어쩌다 도랑 같은 곳이라도 만나면 도리 없이 우리 중 한명이 그를 업어야 했다. 친구는 체격도 크고 몹시 무거웠다. 업은 채 끙끙대면 “똑바로 못 업지?” 하면서 농을 치곤 했다.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유쾌했다.

집안에 여유가 있던 친구는 장애인용으로 개조된 차를 운전했다. 혜택받은 소수였던 셈이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도 유쾌할 수 있었던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명랑한 친구가 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무척 단순했다. 오직 그 학과만 1층에 사무실과 강의실이 있었고, 차에서 내린 뒤 계단을 통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턱이 있어 힘들긴 해도 2층, 3층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평생의 진로를 좌우할 학과 선택의 이유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었다.

실은 그의 삶 자체가 그랬다.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참 많았다. 혜택받은 소수였는데도 그랬다. 장애인 대다수가 겪는 삶의 어처구니없음은 어느 정도일까?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졸업할 무렵 친구를 따라 지역의 사회복지관에 갔을 때 경사로와 안전 손잡이를 처음 접했다. 친구는 종종 거기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함께 커피를 마시는 친구가 참 편안해 보였다. 불편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거기 있었다.

장애인 권리 예산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 탑승 시위를 주도해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지난 17일 경찰에 체포됐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경찰은 필요한 영역이 있으면 추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받는 혐의는 38개에 달한다. 2021년 1월부터 올해 1월20일까지 신용산역·삼각지역·경복궁역 등지에서 집회나 지하철 탑승 시위를 하며 도로를 점거하고 열차 운행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18차례에 걸친 경찰의 출석 요구에 불응했으니 체포가 당연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을 법하다.

지하철 탑승 시위 등으로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며 일부 보수정치인과 언론이 비난여론 조성에 앞장섰다. 시민이 불편하지 않도록 온건하게, 합리적으로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비분강개하며 소개하는 불편 사례들이 적나라하다. 그들이 옳다. 시민이 겪는 불편은 당연하지 않다. 나도 그런 불편을 겪고 싶지 않다. 시민의 출근길 잠시간의 불편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장애인이 겪어온 평생의 불편도 당연하지 않다. 시민의 불편과 장애인의 불편이 꼭 대립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돈을 쓰면 된다. 소수의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에 많은 돈을 쓰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장애인 예산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3분의 1에 그친다. 평균만큼만 써도 세상이 많이 달라진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장벽 앞에서 한번도 좌절해보지 않았을 사람들끼리 “이만하면 꽤 나아진 것 아니냐”며 자찬하고 있다. 평균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은 은폐한 채로.

그들의 과격한 주장과 달리 그나마의 차별 축소도 온건한 요청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장애인 스스로 나서서 싸워온 치열한 역사가 있다.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만 봐도 그렇다. 장애를 이유로 등교를 거부당하고 임용에 탈락하고 유죄로 몰린 이들이 있었다. 그 분노가 모여 2001년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시작됐고, 2003년에는 58개 단체가 모여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를 결성했다. 삭발하고 농성하고 시위했다. 저 부족한 법조차도 지난한 투쟁이 낳은 결과다.

장애인이 열심히 싸우면서 비장애인도 장애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늘었다. 장애를 성찰하다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 장애 속에 살다가 죽는다. 신생아는 보지 못하고 아이는 걷지 못한다. 부모와 세상 도움 덕분에 보고 걷게 된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때로 병에 걸린다. 의사와 병원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는다. 노인이 되면 어두워진 눈과 귀로 지팡이를 짚으며 주변의 돌봄을 받는다. 이렇게 가족과 이웃이, 건강보험과 요양보험 같은 사회제도가 우리를 돕는다. 능력을 순전히 개인의 관점에서만 정의한다면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 오직 서로 돕는 세상 속에서만 온전한 사람이 된다. 같은 이치다. 서로 돕는 세상에서라면 장애는 더는 장애가 아니다.

장애인의 행위능력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기계적 공정성으로 협소화된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이르게 된다. 능력은 순수한 개인적 자질이나 업적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 이웃, 사회와의 관계,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산물이다. 능력에 대한 보상이 순전히 개인의 몫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남쪽에 마서즈 비니어드라는 섬이 있다. 고립된 채 근친혼이 이어지면서 유전적 청각장애인이 많아졌다. 19세기에는 청각장애인 비중이 미국 전체 평균보다 100배나 높았다. 그러자 섬 주민들은 마치 영어를 배우듯 “수어를 그냥 알게 됐다”. 모두 수어를 했다. 청각장애인은 지역사회의 직업과 오락, 종교활동 등 모든 면에 통합됐다. 결혼도 자유로웠다. 평균이나 평균 이상의 수입을 얻었고 큰 부자도 여럿이었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저자인 미국의 의료인류학자 노라 엘런 그로스는 “사회가 장애인에게 적응을 요구하기보다는 사회가 장애인에게 적응한 것”이라고 통찰한다.

소수의 장애인을 위해 세상 전체가 적응해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인인 우리를 위해 세상이 그동안 적응해왔다. 그 적응을 통해 우리는 장애가 없는 듯 살 수 있게 됐고, 좀 더 나은 존재가 됐다. 지난 몇년 사이 청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지난번 건강검진 때는 제일 작은 소리도 못 들었다. 문득 친구 얼굴이 참 편안했던 사회복지관이 떠오른다. 그런 곳이라면 어두워진 귀로도 살 만할 것 같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당신도 같이 가면 좋겠다. 이곳이 그 섬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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