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지인이 여러 신문에 난 기사를 모두 모아서 보내주었고 그것을 본 누군가가 액자로 만들어 주었다. 원혜덕 제공
[삶의 창]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 자랄 때까지 우리 식구끼리만 살아본 적이 없다. 사실 같이 살던 언니, 오빠들도 다 우리 식구였으니까 이 말은 틀린 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6·25 전쟁 뒤 서울에서 잘나가던 청부업을 접고 경기도 부천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셨다. 많은 젊은이가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았다. 언니들은 큰 방인 안방에서 딸들인 우리와, 오빠들은 아버지가 바로 옆에 따로 지어놓은 집에서 잤다. 밥은 우리 방에 다 같이 모여 먹었다. 그들 중에 한 오빠가 있었다. 그 오빠는 늘 양쪽 어깨를 올리고 팔을 흔들며 다녔다. 아버지가 어깨 좀 내리고 다니라고 하면 “아니, 선생님. 제가 이때까지 이러고 살았는데 그게 고쳐집니까?” 하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 오빠가 그렇게 걷는 건 이승만 정부 때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밑에서 부하 노릇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오빠가 어느 날 패싸움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내고 일본으로 밀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오빠를 조용히 돌봐주던 어떤 나이 든 여성분이 아버지께 와서 그 오빠를 농장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식구들과 같이 농사를 지었고 겨울이면 잡곡을 팔아 경비를 만들어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다니셨다. 그러던 중에 사신 건지, 누군가가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조그만 헌 오토바이가 하나 생겼다. 아버지가 그 오토바이를 타고 외출하실 때면 그 오빠는 아버지 뒤에 대고 다 들으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기는 오토바이 타고 놀러 다니면서 우리는 일만 하라고 한다고. 아버지가 펑크 난 자전거 바퀴를 때우고 계실 때도 자기는 편한 일만 한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때 같이 살던 언니가 우리가 다 자란 다음에 해줬는데 그 말을 듣고 우리 형제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버지는 많은 공동체 식구들과 농사지으며 살아가느라 애를 많이 쓰셨다. 어느 해 쌀 살 돈을 마련하려고 수박과 참외를 많이 심었다. 그 오빠가 원두막을 지켰는데 참외를 사 먹으러 온 이웃의 방직공장 처녀가 청혼하여 결혼하게 됐다. 오빠가 그 언니를 인사시키겠다고 데려왔을 때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호적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오빠에게 호적이 없는 줄 나는 그때 알았다.
아버지 팔순 때 아버지와 가까운 분들을 농장으로 초대했다. 아주 오랜만에 그 오빠도 왔다. 식사 전에 감사 예배를 보는데 마지막에 그 오빠가 앞에 나와서 말했다. 어느 큰 병원에서 수위로 일한다고 하면서 “저는요. 풀무원에서 살 때 선생님이 늘 남을 위해서 살라고 하셨는데 가진 것이 없어서 남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가 우리 병원에 어느 환자가 수술비를 못 내서 퇴원을 못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밤 당직일 때 문을 열어주고 그 사람을 도망가게 했어요.”
그 오빠가 결혼해 살림을 나간 뒤 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아버지가 같이 살 때 그 오빠가 한 말이라면서 들려줬다. “제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농사만 짓고 사니까 갑갑해서 도망가고 싶었는데 왜 도망 안 간 줄 아세요? 저는 깡패 노릇 하면서 돌아다녀서 호텔에서 자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길바닥이나 산속에서 잘 때가 더 많았어요. 늘 쫓겨다니면서 오늘은 어디서 자나? 하면서 살았는데 여기 오니까 하루 일이 끝나면 그냥 들어가 잘 데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두번째는, 애들이 저를 보고 형, 오빠라고 불러준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가족의 정을 모르고 살았는데 처음으로 가족의 정을 느꼈어요. 아이들이 저를 형이나 오빠로 부르는 게 그렇게 듣기 좋았고 저를 따르는 게 좋아서 도망을 안 갔습니다.”
그 오빠는 술을 너무 좋아하다 천공이 생겨 남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