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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먹고살기 위해 ‘죽을 만큼’ 노동하자고요?

등록 2023-03-26 18:08수정 2023-03-27 02:41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22일 서울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인근 직장인을 대상으로 정부 근로시간 69시간 개편안 찬반 설문조사와 공 던지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22일 서울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인근 직장인을 대상으로 정부 근로시간 69시간 개편안 찬반 설문조사와 공 던지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우리는 왜 열심히 노동하는 것일까? 가장 흔한 이유는 ‘다 먹고살자’고 일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생명 그 자체를 유지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나 아렌트 역시 ‘노동’(labor)을 ‘활동적 삶’(vita activa)의 한 유형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먹고사는 활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표현인 ‘애니멀 라보란스’(Animal Laborans)에서 읽을 수 있듯, 노동하는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도구’를 제작하는 단계부터 시작된다. 지상에서 인간처럼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제작한 도구에는 인간 고유의 창조성이 묻어 있다. 이 창조성은 단순히 도구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궁극적으로 여러 정치제도를 만드는 데까지 확장된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여기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인간’(homo)적 활동을 한다. 이런 활동적 삶의 유형을 ‘작업’(work)이라 부른다.

이렇게 도구를 만드는 일보다 더 인간적인 활동은 ‘공유하는 세계’를 짓는 ‘행위’(action)다. 인간은 각자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로운 공간에서 다른 존재의 말과 행동을 이어서 함께 공통으로 소유할 수 있는 공공의 세계를 짓는 활동을 한다. 이상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그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였고,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적 정치 활동의 본질이다.

누군가는 왜 정치 따위가 예술보다 더 인간적인 활동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서로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익’이라는 뜻을 지닌 ‘interest’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를 쪼개어놓으면 ‘사이에’(inter) ‘존재한다’(est)는 뜻이 된다. 이기심의 원천이라 여겨지는 ‘이익’조차 인간이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런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타인이 필요한 공유하는 세계를 짓는 행위는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과 가장 맞닿아 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세계에서는 활동적 삶 간에 서열이 존재했다. 노동보다는 작업이, 작업보다는 행위가 더 나은 활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근대에서 이 서열이 거꾸로 뒤집히는 일이 일어났다. 근대 이후의 인간들이 공유하는 세계를 만드는 일보다는 도구를 만드는 일에, 도구를 만드는 일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게 된 것이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소비사회’의 도래에 있다.

우리 대다수는 더 나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더 소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소비하는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소비하는 인간은 항상 더 나은 것, 더 많은 것, 더 사치스러운 것을 갈망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서로 상응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소비력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 노동에 있기에 소비하는 인간은 ‘노동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는 발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다행이라면, 20세기에 들어서며 너무 지나친 노동은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노동시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1919년 국제노동기구를 형성하고, 하루 8시간 노동 기준을 세우고,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합의가 생겨난 이유다.

더 다행이라고 한다면, 경제가 발전한 대다수 국가가 노동시간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먹고살기 위해 ‘죽을 만큼’ 노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까? 이 평범한 사실을 수긍하고 대다수 국가가 ‘건강하게’ 노동하는 길을 찾아 노동시간을 줄여나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목표로 삼아온, 야만적이라 불러도 좋을 60시간이 넘는 노동은 이런 기본적 흐름과 온전히 상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현재 주당 52시간 노동에도 한해 최소 500명 이상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고 있다. 최소라고 표현한 건 공식적인 통계조차 없는, 무시되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동한다는 것이 죽을 만큼 노동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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