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도쿄 게이오대에서 열린 한일 미래세대 강연에서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6~17일 일본을 방문해 일제 강제징용에 관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과 국회,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일본 정부가 학수고대하던 해법”을 선물했다. 나아가 한국 국익을 위한 어떠한 의제도 꺼내지 않은 채, 일본 국익에 관련된 의제만 잔뜩 받아 귀국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 차원을 뛰어넘는 중요성이 있다. 그 심층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첫째, 윤석열 정부의 독단적 국정 운영이 본격화됐다. 윤 정부는 출범 초기 혼란의 시간을 보내다가, 대통령 중심의 권력 구조를 구축한 뒤 야당, 노동·시민단체, 비판 언론들을 표적으로 한 공세로 전환했다. 이는 보수층 여론을 움직여 지지율 반등을 꾀하려는 프레임 정치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야당은 물론 국민 여론까지 밀치며 가는 독단성이 드러났다.
이런 독단이 어떤 국가적 위험을 초래하는지는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서 확인된다. 박 정권은 자국민의 존엄이 관련된 사안에 국회와 국민의 뜻을 묻지도 않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국가 간 합의에 서명했다. 일제 범죄를 국제사회에서 비판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정권이 일방적으로 국익을 규정하고 국민에 강요하던 오만이 윤 정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둘째, 대통령과 집권세력 지도자로서의 무능이 무능으로 끝나지 않고 향후 대한민국에 깊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본 외무성과 언론이 윤석열-기시다 회담에서 논의됐다고 밝힌 주제들에는 독도 영유권,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박근혜 정부 ‘위안부 합의’ 이행 요구 등 여러 중대 사안이 포함돼 있다. 이런 사안들이 이슈가 됐다는 것 자체가 주의 대상이다.
민주적 정권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것은 아니며, 비민주적 정권이라고 해서 항상 무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비민주적이면서 무능한 정권은 최악이다. 국익과 국민을 제대로 챙길 줄도 모르면서도,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중요한 결정과 행동을 범할 수 있다. 국민이 주목하지 않는 사이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고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셋째, 대통령이 자국민 의사, 국익보다 타국의 여론, 이익을 우선시하는 종속적 태도는 통치의 정당성을 의심케 한다. 윤 대통령은 국내 여론은 묵살하면서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베 정권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무시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을 공격한 것에는 침묵하면서, 양국관계 악화를 한국 쪽 잘못 때문으로 돌렸다.
국가는 정치공동체의 공동 이익을 실현할 공적 책임과 권한을 가진 유일한 조직체다. 국가지도자가 자국민, 자국 정부,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 정치공동체는 구심력을 잃는다. 그에 대한 비판을 반일 감정, 민족주의, 피해자 콤플렉스로 모는 것은 사안의 본질을 흐린다. 국가 사이 진정한 우호 관계는 각기 국익을 추구하는 정부 간의 평등한 협상과 대화로 만들어진다.
넷째, 한-일 관계와 관련한 윤석열 정부의 최근 행보는 한·미·일 동맹이라는 외양 아래 실제로는 미-일 동맹의 이익에 한국을 종속적 파트너로 편입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만약 향후 미-중 갈등 고조와 북·중·러 연계 강화가 진행돼 ‘판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한반도는 그 점화 지대가 될 수 있다. 이를 예방하려면 한국 정부는 ‘동맹’과 ‘국익’ 사이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상황은 국내에서는 극우 세력의 호전적인 한반도 인식과 전략이 정부 정책에 강하게 반영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일본과는 일체 긴장 관계를 회피하려는 윤 정부 때문에 한반도 긴장 고조를 제어할 제동장치가 없는 상태다. 힘으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군사적 충돌 위험은 커지고 있다. 그 위험은 실제적이다.
민주주의, 정부 역량, 대외주권, 평화 구축이라는 핵심 가치에서 현 정권은 이번 한-일 관계 이슈를 통해 독단, 무능, 종속, 대결 심화라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상의 여러 상황이 단지 현 정권 임기 동안의 일시적 정책 실패가 아니라, 다음 정부가 노력해도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문제들을 낳을까 깊이 우려한다. 이런 현실을 무기력하게 방관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무책임이요, 미래를 살아갈 어린 세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물려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