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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양이는 상속세를 내지 않아

등록 2023-04-06 18:46수정 2023-04-07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친구의 고양이를 묻어 주러 멀리 남쪽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고양이는 오래 병치레를 했고 친구도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사람처럼 사망진단서를 떼고, 장례업체를 구하고, 조문 연락을 돌릴 일도 없다. 그러나 차창에 기댄 친구 이마엔 수심이 가득했고, 한참 만에 복잡한 머리 한켠을 터놓았다. “쟤 먹이려고 캔이며 약이며 잔뜩 쟁여뒀는데, 그건 어떻게 해?”

나도 친구도 답을 알고 있다. 여러번 경험했던 일이다. 동물도 병이 들면 처방식과 약을, 입맛이 까다로워지면 기호성 좋다는 사료를, 몸이 불편하거나 볼일을 못 보면 특별한 장비를 구해 바쳐야 한다. 찾는 이가 적은 제품이니 비싸고 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코로나 기간엔 품귀현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럴 때마다 중고시장에서 귀한 보따리를 찾곤 했다. 친구는 얼마 전에도 그런 물건을 사러 갔다가 훌쩍이며 돌아왔다. 판매자의 고양이는 바로 전날 떠났다고 한다. “집에 두면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아서요.” 친구도 떠난 고양이의 물건들을 다른 고양이, 아마도 늙고 아픈 고양이 주인에게 넘길 것이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순환이다. 인간의 죽음 역시 이렇게 단출할 수는 없을까? 차창 밖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며 나는 가벼운 멀미를 느꼈다.

서른 즈음에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절차가 끝나고 편하게 수다를 떠는데 동창이 이런 말을 했다. “생명보험은 게임이야. 인간의 불확실한 수명에 베팅하지. 고객이 언제 죽을지 알면 성립할 수 없거든.” 요즘 들어 그 말을 자주 떠올린다. 어느덧 나도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워진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엉뚱한 고민이 생겼다. 내 손안의 돈이야 가소롭지만, 그래도 갖은 고생을 하며 모아왔잖아. 그런데 죽기 전에 다 못 쓰면 어떻게 하지?

물론 상속이라는 제도가 있다. 수십 수백억 재산을 가진 이들이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넘겨주려고 편법 탈법을 일삼는다. 젊은 날에 남들은 평생 못 모을 재산을 번 유명인이 빌딩이며 코인으로 그 돈을 뻥튀기하려는 이유도 누군가 물려줄 사람이 있어서 그렇겠지. 전직 대통령의 손자가 고백하듯이, 재산이 있으면 일요일마다 자손들이 줄줄이 찾아와 인사하며 외롭지 않게 해준다고 한다. 세상의 상식은 이쪽이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먹지도 못할 도토리를 쌓아두는 다람쥐처럼 보인다.

어쩌다 보니 나는 적극적 비혼 1세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 뒤로도 ‘물려줄 누군가’가 없는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이 줄을 짓고 있다.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주머니가 넉넉해서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안전판이 없으니 더 알뜰하게 살고 어렵게 돈을 모아 왔고, 그러니 다 못 쓰고 떠나기가 아쉬운 게다.

내겐 몇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먼저 좀더 나이 들면 소유물을 일정한 비율로 줄여나가야겠다. 1년에 10분의 1 정도씩? 꼭 마지막까지 안고 가고 싶은 애장품이 있다면, 좋은 컬렉션을 만들어 죽고 난 뒤 통째로 기증하는 게 좋겠다. 가까운 사람이 좋아할 물건은 미리 지정해두는 방법도 있겠지. 부채를 털고도 현금이 남는다면 업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프로젝트를 집행한다. 좋아하는 만화책 100권 패키지를 만들어, 금액이 허락하는 만큼 학교나 단체들에 기증한다. 일정액을 떼뒀다가 내가 기획한 장례파티를 열고도 싶다. 내가 지정한 밴드와 요리사를 불러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먹고 떠들 수 있게 한다.

매년 조금씩 생각이 바뀔 것도 같다. 후원할 단체, 널리 퍼뜨리고 싶은 책, 새로운 장례식 아이디어…. 친구들과 정기적인 유서쓰기 모임을 하며 고민을 나눠도 좋겠다. 어떻게 하면 죽은 내가 산 나의 돈을 더 잘 쓸 수 있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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