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군인이 우크라이나 군인을 참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이 등장하자,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짐승들’이라며 강력 비판했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러시아가 지난해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드러내는 잔인함과 증오심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4월 초 드러난 ‘부차 집단학살’, 어린이 납치 의혹 등 전쟁범죄 고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참수 영상까지 등장했다.
위장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남성이 우크라이나군 군복을 입은 이의 목을 베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유포되고 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1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군인 2명이 머리와 손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도 함께 나돌고 있다.
포로로 보이는 이를 잔인하게 죽인 전쟁범죄자는 물론, 범죄 장면을 촬영하고 영상을 퍼뜨리는 이들도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이다. 어쩌면, 영상을 퍼뜨리는 이들의 책임이 더 클 수도 있다. 폭력과 증오는 또 다른 폭력과 증오를 부르는 ‘전염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을 유포하는 이들도 바로 이 점을 노렸을지 모른다.
영상이 공개되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짐승들”이라며 규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는 유엔 인권감시단도 범죄자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반응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정의의 응징’을 다짐하는 것만으로는 폭력과 증오를 부추기는 세력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다. 그들이 노리는 핵심 대상은 궁지에 몰려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될, 평범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일 수 있다.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전쟁을 뒷받침할 무기로 삼는 게 증오 세력의 속셈일지 모른다.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내기만 하면 평화가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도 비슷한 이유로 한계가 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의 불안과 공포, 증오심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이룬 평화는 언제든 다시 깨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의 비극>이라는 책을 낸, 미국 로드아일랜드대 니콜라이 페트로 교수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정교회를 연구하기 위해 2013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친러시아 정부에 맞서는 ‘마이단 봉기’를 접한 뒤부터 우크라이나 내부 갈등을 연구해왔다.
페트로 교수는 이번 무력 충돌이 해소되더라도, 우크라이나인 다수와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사이 갈등과 서로를 향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나라의 비극을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둘러싼 충돌에서 찾는다. ‘러시아적인 모든 것을 배제한 것’을 국가 정체성으로 보는 서쪽 사람들과 역사·문화적으로 러시아와 연결되는 ‘지역적 정체성’을 보는 동쪽 사람들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둘의 갈등은 1·2차 세계대전, 2014년 돈바스 내전 그리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모두 4번의 무력 충돌로 표출됐다고 그는 지적한다.
페트로 교수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진실과 화해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서로 용서하는 길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제안을 한가한 이야기로 치부할지언정, 증오를 부채질하는 것만은 삼가야 한다. 증오 세력을 돕는 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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