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마이 무따 아이가, 고마해라.’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은 칼침을 서른번 넘게 맞는다. 그렇게 찔리면, 허파에서 그러모은 바람을 목구멍으로 내보내 혀와 이와 아래턱을 옴짝거리며 ‘고마해라’라고는 절대 못 한다. 처참한 최후를 침묵 속에서 길-게 맞이할 뿐. 그래서 ‘착한’ 무사는 단칼에 적의 목을 베고, ‘인간미 넘치는’ 망나니도 단칼에 죄수의 목을 자른다. 무사가 상대를 두번 이상 베는 것은 실력 없고 지저분하며 배려심 없는 행동이다.
‘단칼’처럼 ‘단’(單)이 들어가 어떤 행동의 횟수가 오직 한번뿐임을 나타내는 말이 몇 있다. 단숨, 단번, 단걸음, 단매, 단붓질, 단술, 단모금…. 대부분은 ‘~에’가 붙어 한번의 행위로 뭔가가 완성된다는 뜻을 더한다. 서슬 퍼런 칼의 이미지 그대로 ‘단칼에’는 단호하고 여지가 없다. 단칼에 거절하고, 단칼에 무찌른다!
당신은 뜨뜻미지근한 사람이 좋은가, 화끈한 사람이 좋은가. 아마도 화끈한 사람을 좋아하겠지. 그러니 일도양단, 쾌도난마. 한번의 칼놀림으로 엉킨 실타래를 싹둑 자르고, 옳고 그름을 확연히 구분하며,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정리하여 해법을 밝히 보이는 자를 유능한 지도자로 삼는다. 힘이 세고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단칼에 결정하는 횟수가 잦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세상사는 징글징글하게 복잡하다. 단칼에 뭔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진리를 독점한 집단, 진리에 집착하는 권력만이 이 세계를 단칼에 주무를 수 있다고 믿는다.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는 법을 모른다. 단칼에 벨 수 있는 건 단칼에 벨 수 있다는 그 마음뿐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