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믿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갑절은 예의 바르다. 몸에는 온통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습이 배어 있어 예의범절에 어긋난 언행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결단코 음식을 먼저 먹지 않는다.
이 ‘예의범절’이란 녀석은 또렷하기보다는 막걸리처럼 뿌옇고 흐릿하다. 법보다는 관행에 가깝고 경험에서 비롯된 게 많아 사람마다 기준도 들쑥날쑥하다. 감각에 가까운지라,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몸과 마음이 곧바로 익숙한 쪽으로 쏠린다.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가끔 무엇이 예의 있는 언행일지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어른 두분을 모시고 식당에 갔다고 치자. 식당 직원이 “몇분이세요?”라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 답을 하는가? 나는 이때 참 난처하더라. “세분요”라고 하면 나도 높여 말하는 거라 민망하고, “세명요”라거나 “세 사람요”라고 하면 어른 두분을 싸잡아 낮추는 것 같아 머뭇거려진다. 그렇다고 “두분과 한명요”라고 하면, 말도 구차해 보이고 바쁜 직원에게 복에 없던 덧셈을 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속으로 ‘역시 난 비겁한 길만 택하는군’ 하면서 “셋이요!”라고 한다.(모래야,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쪼잔하냐?)
인간은 당연한 듯이 이 세계를 나와 남, 자신과 타인으로 분별한다. 게다가 한국어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질서를 촘촘히 갖추고 있다. 높여야 할 상대와 낮춰야 할 자신이 한 덩어리 말에 뭉쳐 들어갈 때 허점을 보인다. 반갑다, 무질서한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