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서울 동대문구의 한 중식당에 “각자 계산 불가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엠제트(MZ)세대 더치페이 논쟁’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식당에서 학생 5명 가운데 한명은 음식을 시키지 않고 안 먹고 있기에 한 누리꾼이 그 학생의 음식을 주문해줬다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이 십시일반해 음식을 시켜주면 될 텐데 정 없게 그냥 있었느냐며 ‘요즘 애들’에 대한 성토가 덧붙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의 의견이 나뉘었다는 게 요지였다. 기사를 읽고 나폴리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며 여러 측면에서 해방감을 느꼈는데 그것 중 하나는 각자 계산, 즉 더치페이 문화였다.
나폴리에서는 식사가 끝나면 식당 계산서에는 ‘총 40유로가 나왔고 4명이므로 10유로씩 내면 된다’는 식으로 각자 계산할 비용이 적혀 나왔다. 내가 먼저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 일도,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계산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오해를 받을 일도 없다. 그게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 음식이, 2~3인용 찌개처럼 하나의 메뉴를 여럿이 나눠 먹는 게 아니라 1인 1피자 식으로 개별 주문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자 음식을 시키지만 맛을 보겠느냐고 말을 건네고, 음식 맛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호의를 베풀며 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값은 자신이 먹은 음식은 자신이 계산하는 것이다.
음주문화도 그렇다.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다면 계산대에서 내가 마신 술값만큼 현금이나 카드로 계산하고 가면 된다. 끝까지 술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계산대에서도 난색을 보이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게 당연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누구나 그의 의사를 존중했고 가게 눈치를 보며 어떤 메뉴라도 시켜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자유의지가, 각자의 주머니 사정이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각자 잔을 각자가 계산하기에 매번 술을 시키지 않는 그 친구를 무임승차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20대 초반에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2차, 3차까지 남을 일도 없는 대학 시절을 보냈는데, 만약 이런 문화였다면 얼마나 더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을까. 물론 여기에는 한국처럼 서로에게 따라주는 게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술을 한잔씩 시켜 마시는 문화라는 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은 유럽이고 한국에는 한국의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나라 문화를 이야기한 이유는 그 경험에서 느낀 나의 해방감 때문이다. 한국에서 내가 불편했다는 것이다. 더치페이 문화, 대환영이다.
논쟁이 일어났다는 인터넷카페의 댓글난과 달리 기사 댓글들은 더치페이가 합리적이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음식을 시키지 않은 학생을 보며 ‘돈이 없어서’라고 딱하게 여긴 것은 글쓴이의 주관 아닐까. 그것이 왜 불쌍하고 정이 없는 것이냐고, 배가 고프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해진 용돈 안에서 주체적으로 아끼려던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후자 쪽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대가 달라졌다. 키오스크 환경에서 자라난 지금의 10대들은 앞으로 각자 계산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전 국민이 하나의 모바일메신저 앱을 사용해 더치페이를 하기에 이렇게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나라도 없다. 분명한 건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 의식이 달라지고 있고, 판매자도 따라야 한다. 바쁜 시간에 여러명이 줄 서서 카드로 각자 계산한다고, 난색을 보이거나 기분 나쁜 소리를 하지 않길. 한국에서도 그게 당연한 일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