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김준영 사무처장을 경찰이 제압하고 있다. 경찰은 저항하는 김 사무처장을 길이 1m 플라스틱 진압봉으로 1분여간 내리쳤다. 한국노총 동영상 갈무리
[아침햇발] 이재성 | 논설위원
경제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었던 고전학파를 거쳐, 과잉생산으로 대공황을 겪은 1930년대 이후에는 수요를 중시했던 케인스주의가 시대를 풍미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면서 자본주의 경제학의 내부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인적투자가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시어도어 슐츠와 자본축적 및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를 중시하는 윌리엄 루이스가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고, 기술의 진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 로버트 솔로는 198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성장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세 명의 공통점은 노동의 역할이나 기여를 경시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의 일원으로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할 자본의 임무를 기술한 이론이므로 당연한 결과다. 이들의 이론이 일관성이 있다면, 경제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역성장에 빠지는 이유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23년 한국 경제가 1%대의 저성장에 그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인적투자의 부족인가, 자본축적이나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의 부족인가, 아니면 기술발전이 부족해서인가? 외환위기나 코로나 같은 외생 변수 없이 찾아온 초유의 1%대 성장 사태를 맞아 반드시 짚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한국경제의 자본축적은 이미 충분한 상태이고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루이스의 이론은 일단 논외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인적투자(슐츠)와 기술발전(솔로)만 남는다. 공교롭게도 인적투자와 기술발전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우수 인재가 적정한 보상과 인정을 받으면서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어야 기술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은 가히 망국적이다. 의사 집단에 지나치게 많은 사회적 영광과 포상이 주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기초과학과 산업현장의 엔지니어에 대한 자원 배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지 오래다.
당연하게도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아주 빠르게 좁혀지고 있고,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중국이 앞서는 분야도 많다. 15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무역적자의 근본 원인도 중국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한국이 수출하던 제품의 비교우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통계로 확인되고 있다. 디스플레이 같은 중간재가 대표적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을 대체할 시장이라고 믿었던 베트남 역시 빠르게 중국 시장처럼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 대베트남 수출은 5월 현재 전년대비 24% 줄었다. 반도체 착시와 중국몽의 숙취가 걷히면서 한국경제의 숨겨진 실력이 뒤늦게 드러나고 있다. 인적투자 실패와 기술혁신 지체가 쌓여 급속하게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와 언론을 비롯한 한국의 지배권력은 저성장의 원인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강성노조에서 찾고 있다. 노동을 때려잡아 저임금을 유지해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믿는다. 노동을 유연화해야 한다며 1996년 노동법을 날치기하면서까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깨뜨렸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문제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경제성장이 왕성할 때도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고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격하게 곤봉을 휘둘러 노동자의 정수리를 가격한다고 해도 중국이나 베트남보다 임금을 낮추기는 어렵다. 임금이란 노동의 재생산에 필요한 음식과 주거 등 생존 비용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를 비롯한 사회적 비용의 총체로 결정되므로, 해당 국가의 구매력이나 생활 및 물가 수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조선업의 경우, 중국의 인건비는 한국의 약 3분의 1 정도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의 조선소는 인력이 부족해서 난리다. 실제로 하청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인력 수급에 지장이 생길 정도까지 임금이 낮아졌다. 임금을 더 낮추고 싶어도 내부적 요인으로 그럴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한국은 이제 더이상 저임금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던 과거의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상생은 신자유주의 퇴조 이후 선진국들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가치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노조를 통한 분배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은 단순한 선거 전략이 아니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건전한 중산층이 경제 성장의 기본 토대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성장에서 기술발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에 대한 선견지명과 과감한 투자가 없었다면 한국경제는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배터리에 대한 엘지 구본무 회장의 뚝심있는 투자와 에코프로 이동채 회장의 시지프스 같은 노력이 아니었다면, 전기차 시대를 맞는 우리의 심정이 이렇게 편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시 한번 자본이 기술혁신이라는 의무를 다해야 할 때다. 인건비 비중이 매출의 15%나 되는 자동차가 10%인 조선이나 5~6%인 철강에 비해 세계 시장에서 선전하는 이유는 기술과 디자인 혁신이라는 자본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구하기 위해 지금 당장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인적투자가 기술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의대 쏠림 현상을 시정하고,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초과학을 강화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착오적 노동혐오를 중단해야 한다. 한국이 여전히 개발도상국인 줄 아는 지배권력의 퇴행은 성인이 되어서도 성장호르몬을 놓아달라고 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곤봉을 휘둘러 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지겠지만, 나라 경제는 불치의 성인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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