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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후쿠시마의 바닷속에 우리의 사랑이 있다

등록 2023-06-21 19:07수정 2023-06-22 02:07

2018년 12월27일 강원도교육청 앞에서 아이를 품고 시위를 하는 진수민님. 양창모 제공
2018년 12월27일 강원도교육청 앞에서 아이를 품고 시위를 하는 진수민님. 양창모 제공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나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를 이미 5년 전에 겪었다. 전국에서 생활공간 방사선량이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 이곳 일부 지역에서는 경북 울진 원자력발전소 주변보다 4~6배나 높은 방사선량이 측정됐다. 바로 내가 사는 춘천이다(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보고서 2020년). 처음 이 문제를 발견한 게 2014년이었다. 그 이후 6년간 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베크렐이니 밀리시버트니 하는 생경한 말들이 아니었다. 그 전문용어들 뒤에 숨어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꽤 많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직원들을 만났다. 이곳 춘천에 와서 함께 측정해달라 부탁하고 대책을 마련해달라 사정도 했다.

“저보고 후쿠시마 근처에 가서 살라 하면 살 수 있습니다. 방사능으로 (춘천의) 땅값 떨어지면 제가 그 땅 사드릴게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얘기 같지 않은가. 지금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로 인해 불려 나온 총리와 몇몇 전문가가 한 얘기는, 4년 전 시민들이 개최한 공청회에서 원안위 책임자가 춘천 시민들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시청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저선량 방사선에 노출된 양에 비례해서 암발생률은 증가한다”는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의 발제를 듣고도 그들은 최소한의 사전예방원칙도 지키지 않고,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는 골재채취장에 대한 아무런 조치 없이 원안위 의견에 근거해 사태를 종결했다.

원안위 사람들도 시청 공무원들도 모두 바람개비 같은 사람들이었다. 바람이 불어야 겨우 돌아갔다. 스스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을 만든 사람들은 윗선 책임자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민이 바람개비가 돌도록 나섰다. 두 아이의 엄마, 과외교습소 교사, 임산부, 취업준비생, 생협 직원…. 이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생각하고 한발짝 앞으로 나갈 때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뒤로 한발짝 후퇴할 때마다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의 힘으로 저 바람개비들은 마지못해 겨우 돌아갔다. 공인들이 자신의 공공조직을 사유화할 때 시민들이 공공기관 역할을 대신하던 모습은, 저주받은 장소처럼 느껴졌던 이곳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주었다.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세계에 사는 건 불덩어리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 불이 뜨겁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뜨겁다면 깜짝 놀라 당장에 그 불덩어리 위에서 내려올 것이다. 하지만 이 불은 기이하게도 냄새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만질 수도 없다. 그저 무감하게 천천히 타들어 갈 뿐이다.

지금 우리의 사랑이 저 바닷속에 있다. 우리 가족이, 아이들이 한 마리 돌고래처럼 우럭처럼 저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 단지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만으로 방사성 물질을 풀어놓으려 한다. 그것은 발사된 총알과 같다. 한번 풀어놓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거기에 풀어놓은 게 무엇이든 결국 가장 상위 포식자인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다량의 세슘이 검출된 후쿠시마의 우럭은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한장 있다. 그 사진 속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안은 채 ‘방사능 수치가 높은 학교 이름을 공개하라’는 팻말을 들고 강원도교육청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 함께 시위했던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알고 보니 그는 시를 쓰고 있는 거였다.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흰 종이 위에 쓰는 게 아니라 거리 위에 썼다. 펜 대신에 플래카드를 들고 낭송 대신에 구호를 외치며 그는 시를 쓰고 있다. 아이 젖병을 챙기던 손으로 밤새 반핵 마스크를 만들던 그가, 막내를 낳은 지 몇달이 안 된 몸으로 칼바람에 아이를 감싸 안고 피켓을 들고 있는 그가 몸으로 써 놓은 시를 본다. 누구도 써 보지 않은 시가, 살면서 이런 시를 읽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 왔다.”

바람개비들은 충분히 질리도록 보았다. 논쟁할 시기는 지났다. 이제 ‘시인들’이 나타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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