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사교육비 총액은 26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연합뉴스
황보연 | 논설위원
학교 운동장 철봉에 턱을 매달고 이를 악물어본 경험이 있는가. 단순히 체력을 기르려고 한 게 아니라, 입시를 위해 ‘오래 매달리기’를 한 것이라면? 입시 점수에 포함된 ‘체력장’은 학력고사 이전 세대의 추억이자, 어떤 이에겐 악몽이다. 1972년 체력장이 실시된 첫해, 체육 과외가 등장했다. 1990년 9월에는 점수를 잘 받으려고 ‘오래달리기’ 연습을 하던 고등학생 3명이 숨졌다. 체력장은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이후에야 입시와 결별했다. 교육학자 이경숙은 <시험국민의 탄생>(2017)에서 “한국 교육사는 선발의 역사”라고 단언한다. 예비고사→학력고사→수능에 이르기까지, 교과 교육과 학생의 삶은 선발제도에 묶여 있었다. 전국 단위 지필시험, 내신, 논술, 수상, 봉사 점수 등 입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과정의 연속이 교육의 전부였다.
지난달 중순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킬러 문항 배제’ 지시 이후, 교육·수사당국의 후속 조처가 급물살을 탔다. 발단은 킬러 문제였지만, 화살의 과녁은 사교육을 정조준하고 있다. 논리는 이렇다. ①학원 강사와 수능 출제자가 유착 관계를 이룬다. ②출제자는 사교육 없이 풀기 어려운 킬러 문제를 내고, 학원 강사는 풀이법을 알려준다. ③금품 수수가 이뤄지는 등 서로의 이권을 도모한다. 교육부는 지난 3일 이런 유착 관계가 의심되는 2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지난 3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2차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범정부 대응협의회 결과를 브리핑한 뒤 배석자들과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학원 의존도를 높이는 킬러 문제를 안 내겠다는 조처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수험생·학부모의 반응이 냉담한 것은 대통령의 ‘사교육 걱정’이 지나치게 수사 프레임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킬러 문제와 이권 카르텔만 뽑아낸다고 사교육 수요가 사라질 리 만무하다. 대한민국의 입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1993년 처음 시행된 수능은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을 탈피해 사고력을 평가한다는 취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학력고사와 다를 게 없다는 혹평을 받는다. 대학별 고사를 전제로 자격고사 시험으로 정착시키고, 상대평가를 거쳐 절대평가로 전환하려던 초기 구상은 일찌감치 무너졌다. 대학별 고사(1994~1996학년도)에 대비하려고 너도나도 사교육을 받으려 하자, 불과 3년 만에 정부가 이를 폐지한 것이다. 결국 수능 점수로 줄세우기를 하게 됐고, 고도의 변별력과 적절한 난이도를 갖추려다 보니 비비 꼬인 문제가 속출했다.
현재의 수능은 많은 문제를 풀어본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사교육 의존도를 높인다. 오죽하면 문제를 양껏 풀어본다는 뜻의 ‘양치기’(입시 은어)란 말이 나왔을까. 학원은 다양한 응용 문제를 제공하는가 하면, 실수를 줄이고 좀 더 빠르게 풀 수 있는 요령을 알려준다. 한마디로 수능은 “사교육에 분석당하고 점령당한 시험”(조장훈, <대치동>)으로 전락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수능 비중을 줄이려고 수시전형을 확대했더니, 수능 공부에 올인하려는 재수가 늘어나는 역설적 상황도 벌어졌다. 지난해 수능 응시자 중 재수생 비중은 31%에 이르렀다. 고교 재학 중에는 내신과 생기부를 챙기느라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재수를 해서 수능 공부에 뛰어드는 추세가 생겨난 것이다. 시간 투자를 하면 수능 점수가 오르고, 그에 따라 대학 간판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깜깜이’ 학종에 대한 불신이 커진 뒤 정시전형이 큰 폭(서울 16개 대학 기준 40%)으로 늘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경쟁이 과열될수록 사교육은 그 틈새를 파고든다. 대학 서열과 학벌이 임금 프리미엄 등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앞으로 대입 정책의 향방도 중요하지만, 고등교육과 노동시장을 그대로 두고 입시만 바꿔서 해결할 문제도 아니다. 이런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겠지만, 집권세력이라면 적어도 중장기 비전과 추진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던진 ‘킬러 문항’ 수준의 담론이 한없이 작아 보이는 이유다.
2021년 영국 <비비시>(BBC)는 수능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수험생들이 “먹고 공부하고 자는” 생활을 반복한다며, 수능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직업과 미래의 인간관계까지 결정하는 중요한 시험”이라고 전했다. 외신들이 종종 유별난 것으로 보도하는 입시 경쟁을, 정작 우리 사회는 당연하고 익숙한 것으로 내면화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온 가족이 역량을 투입해 수험생 자녀의 입시 전략을 짜는 “전투적 교육가족”(이경숙)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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