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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라니’의 탄생을 축복하며

등록 2023-07-26 18:13수정 2023-08-31 17:50

​동성부부인 김규진(오른쪽), 김세연씨가 지난 1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동성부부인 김규진(오른쪽), 김세연씨가 지난 1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라니는 김규진, 김세연 커플이 9월에 출산할 아기의 태명이다. 두 사람은 동성 커플이다. 2019년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했고 한국에선 결혼식을 올렸다. 2020년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라는 책을 냈고, 여러 매체와 인터뷰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침내 올해 6월 김규진씨가 벨기에의 난임센터를 통해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고, 두 사람이 곧 아기의 엄마가 될 거라는 소식을 알렸다.

지난 22일 두 엄마는, 출산을 앞둔 임산부와 곧 태어날 아기에게 주변의 지인들이 축하와 선물을 전하는 베이비샤워도 크게 열었다고 한다. 때가 때인 만큼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라는 제목도 붙였다. 동성애자는 아기를 낳지 못해서 인류에 해를 끼친다는 혐오를 위트있게 비틀면서, ‘저출산’으로 대한민국 소멸을 걱정한다면 지금 어떤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프랑스는 1999년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겠다고 계약을 맺은 동거 커플에게 결혼과 동일한 지위를 보장하는 팍스(PACS)법을 만들었다. 결혼한 부부가 받던 출산·육아지원을 동거 커플도 똑같이 받도록 한 이 법이 만들어지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프랑스는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출산율 1위가 됐다. 지난 16년간 280조원이라는 예산을 퍼붓고도 합계출산율 0.78명이란 성적표를 받아든 대한민국 정부가 뼈저리게 반성하며 살펴봐야 할 정책이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지난 4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5월 프랑스 팍스법과 비슷한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의 반대로 법안은 국회에서 논의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을 보면, 라니가 살아갈 세상이 녹록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짐짓 아기가 걱정된다며 이런 말부터 꺼낸다. 동성애자 부모를 둔 자녀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겠냐고. 일찌감치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과 양육을 인정한 나라에선 동성애자 부모의 역할 수행 능력이 이성애자 부모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동성 부모 쪽이 낫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연구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있다. 이성애자 부모를 두면 자녀들은 행복하냐는 질문엔 연구조사마저 필요 없다. 이성애자라서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될 수도, 자녀의 행복이 저절로 보장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지금 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다. 이성부모 건 동성부모 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레즈비언 커플이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엄마의 성적 지향이 무엇이든 그 때문에 아기가 놀림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아기가 자신을 낳아주고, 사랑을 다 해 기르겠다고 다짐하는 엄마와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길 기도할 수 있다.

부디 세상이, 우리 사회가 이 세명의 가족에게 좀 더 다정한 곳이 되길. 우리는 서로에게 더 다정해질 수 있다. 좀 이상하고 어색하고 낯설게 보인다고 해도 다정함만큼은 유지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귀하게 온 새 생명인 아기에게 혐오와 차별이 가 닿지 않게 할 수 있다. 두명의 엄마와 곧 세상에 태어날 라니에게 축복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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