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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NOT MY PRESIDENT) [박찬수 칼럼]

등록 2023-09-13 14:27수정 2023-09-14 02:37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지지율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진폭이 크다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그래도 ‘모두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징표는 된다. 이제까지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모든 대통령이 적어도 명목으로라도 ‘통합과 협치’를 내걸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윤 대통령은 다르다. 지지율이 30%대를 맴돌고 있는데도 여기서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016년 11월 미국 대선 직후, 도널드 트럼프 당선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이 이마에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쓴 걸 보여주고 있다. 시애틀/AP 연합뉴스
2016년 11월 미국 대선 직후, 도널드 트럼프 당선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이 이마에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쓴 걸 보여주고 있다. 시애틀/AP 연합뉴스

 박찬수 | 대기자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NOT MY PRESIDENT)

몇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시기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구호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유권자 총득표에선 이기고 선거인단에서 패한 뒤 나온 이 문구는, 4년 내내 반트럼프 시위의 단골 구호로 등장했다. 선거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표현이 퍼진 건 이례적이다. 노래도 나왔는데, 가사를 보면 트럼프의 인종차별과 부자를 위한 정책에 강한 반발이 묻어난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뉴욕타임스에 “나는 이 합창에 죄책감을 느꼈다. 트럼프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트럼프스러운 구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나와 내 가족, 내가 아끼는 사람들, 다수의 미국 국민을 대변할 생각이 없는 건 맞다”고 썼다.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정치적 분열과 대립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은 없다.

지난 주말 저녁, 서울시청 앞 지하보도를 지나다가 ‘윤석열은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시민을 봤다. 트럼프 시대의 구호를 패러디한 티셔츠를 서울 중심가에서 마주친 건 뜻밖이었다. 아 그렇구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 갈등이 심해졌구나, 비판과 싫어함을 넘어서 증오와 분노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는 시대가 됐구나,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여러 면에서 윤 대통령은 트럼프와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대통령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국민도 적지 않다. 숱한 논란 속에서도 윤 대통령 지지율은 30%대 초중반에서 더는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비탄력적인 지지율 추이를 보이는 대통령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초반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실시로 지지율이 83%까지 올랐다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엔 6%로 떨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 들어설 때 지지율이 12%였고,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100일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21%로 지지율이 급락했다. 최고 60% 지지율을 기록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당하기 직전의 마지막 지지율은 5%였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지지율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진폭이 크다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그래도 ‘모두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징표는 된다. 국정 운영을 잘하면 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반대로 잘 못 하면 다수가 지지를 철회할 것이란 뜻이다. 이제까지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모든 대통령이 적어도 명목으로라도 ‘통합과 협치’를 내걸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박근혜 대통령의 2012년 대선 슬로건은 ‘100% 대한민국’이었다. 이 구호가 빈말이었음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윤 대통령은 다르다. 지지율이 30%대를 맴돌고 있는데도 여기서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지율이 낮지만 견고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2016년 촛불과 대통령 탄핵의 경험은 진보뿐 아니라 보수 진영에도 뚜렷한 학습 효과를 남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편은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다. 윤 대통령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진 국민만 바라보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의 발언을 한번 보자. ‘반국가’ ‘국기 문란’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쓴다. 윤 대통령은 남북 화해 정책을 추구한 전임 정부를 ‘반국가 세력’이라 지칭했고, 전쟁 영웅의 헌신을 폄훼하는 건 ‘반국가 행위’라고 규정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뉴스타파의 ‘신학림-김만배 녹취파일’ 보도를 “국기 문란으로 사형에 처해야 할 반국가 범죄”라고 말했다. 거의 적에게나 쓸 수 있는 섬뜩한 언어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30%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나의 국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윤 대통령은 1년4개월 동안 제1야당 대표와 단 한번도 대화하지 않았다. ‘사법적 리스크가 있는 야당 대표를 만나는 게 대단히 언페어(unfair·불공정)한 것일 수 있다’는 게 국무총리가 전한 이유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대화하는 건 개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절반의 국민 목소리를 듣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으로 동생이 구속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도 만났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뜻이었다. 경제 상황이 위태롭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적법한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두고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번지는 건 아픈 일이다. 더 안타까운 건, 대통령이 다수의 국민을 배제한 채 국정을 끌고 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국민의 마음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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