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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그래도 ‘수첩’은 있었다 [아침햇발]

등록 2023-09-20 09:00수정 2023-09-20 11:01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9월 13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의 개각 관련 브리핑에 배석한 모습. 연합뉴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9월 13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의 개각 관련 브리핑에 배석한 모습. 연합뉴스

최혜정 l 논설위원

박근혜 정부 실패의 상징 중 하나는 ‘수첩 인사’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았다가, 면담이나 포럼 등 나름의 ‘검증’을 거쳐 인사 때 기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다만 그 후보군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문제였다. 대통령 개인의 직관과 감에 의존한 독단적 인사는 추천과 검증이라는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했다. 국무위원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하거나 구설에 오른 것은 필연적 결과다. 그래도 한때 박 전 대통령의 수첩은 정치권 인사들이 ‘내 이름도 있을까’ 설레어한 ‘인사 데이터베이스’였다. 적어도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은 했다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3일 국방부·문화체육관광부·여성가족부 장관을 교체했다. 세 부처 모두 문책성 인사가 예견됐던 곳으로, 다음 수순은 쇄신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면면을 보니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12·12 쿠데타는 “공백기에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나온 것”, 5·16 쿠데타는 “위대한 혁명”, 민주화는 “인민 민주주의”라고 평가한 인사다. 이명박(MB) 정부 문체부 장관을 지낸 지 12년 만에 다시 지명된 유인촌 후보자는 지난 8월 언론 인터뷰에서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가 재임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여 의혹을 받아온 점에 비춰 보면 의미심장하다. 김행 여가부 장관 후보자는 출근 첫날 “드라마틱하게 엑시트” 하겠다고 했다. 여가부 장관의 책무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건희 인맥’ 의심을 받는 데 이어 청와대 대변인 시절 배우자가 백지신탁 대신 시누이에게 주식을 넘겼다가 되산 것으로 드러났고, 일감 몰아주기 정황도 제기됐다. 쇄신은커녕 기본적인 인사 검증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인사들로 대체된 것이다. “30대 장관이 많이 나올 것”이라던 공언은 쑥 들어가고, 1기 ‘서육남’(서울·60대·남성) 내각에 이어 이들 3명의 평균 나이는 67.6살이다. 특히 유인촌 후보자 재지명은 ‘엠비 빠진 엠비 정부’ 논란의 정점을 찍으며, 여권에서조차 ‘이렇게 사람이 없나’라는 한탄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실은 “과거 정부에 한번 몸을 담았다, 안 담았다, 그건 저희 정부에서 큰 기준이 아니”라며 “가장 중요한 건 전문성, 책임성을 갖고 현재 그 자리에서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느냐”라고 했다. 그 결과가 “18개 부처 가운데 적어도 13개 부처의 장차관이 이명박 정부 인사”(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이어진 셈이다. 발탁 배경으로 전문성, 소신과 강단 등 각종 덕목을 나열하지만, 이런 인사가 유독 이명박 정부에만 몰려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정치 경험이 없어 다양한 분야의 인맥을 갖지 못한 한계와 이명박 정부를 ‘쿨한 정권’으로 기억하는 개인적 호감이 결합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정치 입문 과정에서 이명박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은 현실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제약 조건을 인정한다 해도, 취임한 지 이미 1년4개월이 흘렀다. 취임 초부터 측근과 사적 인맥을 앞세운 데 이어 ‘한번 해봤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 정부 인사 재활용에만 열을 올린다. 인재 발굴은 뒷전으로 미뤄뒀다는 게으름의 고백일 뿐이다.

19일 시작된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인사 참사’의 완결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상장 주식과 자녀 국외 재산 신고 누락, 땅 투기 및 농지법 위반 의혹, 아들의 ‘아빠 찬스’ 특혜 채용 의혹 등 기본 자질을 의심받고 있다. ‘대통령의 친구’라는 것 외에 그가 대법원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분명치 않다.

인사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고도의 정치 행위다. 역대 대통령이 인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고심한 것도 ‘망한’ 인사가 정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사수석을 신설하고 추천-검증 기능을 분리하는 등 ‘시스템 인사’를 표방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정권 말 인사비서관을 인사기획관으로 격상시키며 책임성을 강화했다. 비선 실세가 판치고 불통 인사라는 혹평을 들었던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인재 발굴용 ‘수첩’은 있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줄곧 ‘인사가 망사’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검찰 측근 중심으로 꾸려진 인사 라인은 추천도 검증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인사 시스템 전면 개편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의 독선적 인사가 정권의 발목을 잡는 비극은 그만할 때도 됐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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