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물리학상, 화학상(왼쪽)과 생리의학상의 메달 뒷면. 왼쪽 메달에서, 풍요의 뿔을 안은 여신은 자연을 상징한다. 차갑고 엄숙한 얼굴을 덮은 자연의 베일을 비범한 과학자가 들추고 있다. 오른쪽 메달은 무릎에 책을 펼쳐둔 의사가 아픈 소녀의 갈증을 풀어주려고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달 둘레에 라틴어로 ‘기예의 발견을 통해 인간 삶을 향상하는 일은 유익하다’라는 문장이 있다. 메달 앞면에는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노벨재단 제공
오철우 | 한밭대 강사(과학기술학)
다시 노벨상의 시간이 왔다. 1901년 첫 시상 이후 그 역사도 이제 122년이나 됐다.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자가 누적되면서 통계를 분석해 노벨상의 흐름과 현대 과학의 면모를 짚으려는 연구도 이어진다.
무엇보다 매우 적은 여성 수상자 통계가 눈에 띈다. 한국연구재단이 2019년 펴낸 노벨 과학상 분석 보고서를 보면, 1901년부터 2018년까지 상을 받은 607명 가운데 97%는 남성이고 여성은 3%에 불과했다. 물론 여건과 환경 탓에 여성 과학자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나친 편중 문제는 노벨재단도 중요하게 의식하는 듯하다. 노벨재단은 공식 웹사이트에 여성 수상자 페이지를 따로 꾸려 예비 여성 과학자를 독려한다. 과학계에 진출하는 여성 연구자가 늘면서 100년 동안(1901~2000) 11명뿐이던 여성 수상자는 지난 22년 동안 13명으로 늘어났다.
다음으로 단독 수상이 많던 초기에 비해 공동수상(최대 3명)이 늘어난 점이 두드러진다. 공동수상 추세는 1950년대 이후 확연해져, 요즘에는 두세명 공동수상이 더 일반적이다. 공동연구 사례가 늘고 비슷한 연구에 여러 과학자가 경쟁하며 협력하는 요즘 과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노벨 화학상이 점점 전통적인 화학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적도 눈길을 끈다. 요즘에는 디엔에이(DNA)와 단백질 같은 생체 분자를 다루는 생화학자가 생리의학상뿐 아니라 화학상을 받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이런 추세가 화학상 본래의 성격이 퇴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국의 화학사 연구자 제프리 시먼은 얼마 전 온라인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는 노벨 화학상 위원회의 생화학자 비율이 1910년대 10%에서 2000년대 50%로 증가”한 점을 그 배경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 시차’는 늘어났다. 최근 과학 저널 ‘네이처’는 노벨상 수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1960년대에 비해 두배 이상 늘었다고 분석한 논문을 인용해, 수상자의 거의 절반이 연구 업적을 내고 20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의 연구자들이 3년 만에 초고속으로 수상한 올해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늘어난 시차는 추세가 됐다. 인용된 논문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시차는 화학상에서 가장 커서 평균 30년이었으며 가장 짧은 생리의학상에서도 26년이나 됐다. ‘네이처’는 현대 과학에서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획기적인 연구나 발견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고 풀이했다.
해마다 10월이면 세계 언론이 동시에 노벨상에 주목한다. 한세기 넘게 최고 권위를 유지해온 과학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상만이 목표가 되면 이상한 집착으로 비치기 쉽다. 국내 대학의 외국인 교수가 교내에 걸린 ‘노벨상 받는 방법’ 제목의 토론회 펼침막을 보며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이런 주제의 토론회를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기초연구 환경을 키우고 지원하며 기다리는 연구 문화가 먼저 탄탄해져야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성과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