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올해 3월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김소연 | 도쿄 특파원
1998년 10월8일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1924~2009)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1937~2000) 일본 총리가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바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오부치 총리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포함해 5개 분야 협력 원칙이 담긴 이 선언이 발표된 지 올해로 25년이 됐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많은 부침을 겪었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한-일 관계는 또다시 변곡점을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3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피고인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을 내는 일방적 양보안을 강행하면서 극한으로 치닫던 양국 관계가 완화됐다. 하지만 일부 피해자들의 반발 등 한쪽의 ‘일방적 양보’만으로 실질적인 관계 개선이 이뤄지긴 어렵다.
이를 잘 안다는 듯이 박진 외교부 장관도 양보안을 발표하며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7개월이 지난 지금 어떤 상황일까. 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 등 피고 기업의 사과나 배상을 위한 기금 참여는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2015년 하시마(군함도) 등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진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약속했던 내용을 8년째 지키지 않고 있다. 조선인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겠다며 도쿄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만들었지만, ‘조선인 차별은 없었다’는 등 오히려 역사 왜곡이 추가됐다.
올해 9월1일 100년을 맞은 간토대지진 문제에서도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은커녕 학살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매년 논란이 되는 일본 초·중·고 역사 교과서엔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과 강제동원 피해 내용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꽤 오래전부터 일본 내 분위기는 식민지배 등 과거를 반성하기보다 “뒷세대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2015년 ‘아베 담화’와 가까웠다. 그리고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그 ‘사죄할 숙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윤 대통령 호감도가 높은 이유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25주년을 맞아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실린 사설에 눈길이 갔다. 신문은 윤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지율이 30%대에 그쳐 (한-일) 관계 개선을 추진할 기반이 약하다. 정상이 바뀌어도 후퇴하지 않는 한-일 관계의 행보가 중요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층적 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한-일, 한·미·일 협력의 틀을 제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정신이 되는 이념과 협력해야 할 분야를 명시한 공통의 비전이 담긴 (새로운) ‘공동선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물컵 절반을 채울 생각은커녕 윤 정부의 ‘퍼주기 대일외교’를 붙잡아둘 무언가를 주문하는 목소리라니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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