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충돌 엿새째인 지난 12일(현지시각) 가자지구 중심 도시 가자시티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연기가 치솟고 있다. 가자시티/AFP 연합뉴스
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호기심 많은 한 남자가 어느 날 친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방금 자연사 박물관에서 3시간 동안 구경하고 나오는 길이네. 모든 게 너무 놀라워 솔직히 그 절반이라도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비, 잠자리, 딱정벌레는 말할 것도 없고, 새와 짐승은 어찌나 많던지! 아주 작은 모기도 있었는데 어떤 건 핀 머리보다도 작더군.”
친구가 물었다.
“코끼리도 물론 봤겠지? 어떻던가?”
남자가 답했다.
“코끼리가 있었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만… 난 코끼리를 보지 못했다네.”
러시아 작가 이반 크릴로프가 쓴 우화 ‘호기심 많은 남자’ 이야기다. 핀보다 작은 모기는 봤지만, 집채만 한 코끼리는 못 봤다는 남자의 말은 사실일까. 작정하고 외면했거나 보고도 못 본 셈 친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는 문제를 말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보름을 넘어가고 있다. 나와 가족, 마을, 나라를 단숨에 집어삼키는 전쟁은 집단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공포다. 그렇기에 기후문제도 경광등 번쩍이는 국가안보에는 길을 양보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느 날 국방장관이 “이제 우리 군도 2050 탄소중립을 달성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다들 귀를 의심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국방 부문의 탄소는 방 안의 코끼리였다. 전쟁을 치르고, 평화를 지킬 때도 어쩔 수 없이 온실가스가 배출되지만, 누구도 문제 삼고 싶어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1997년 교토의정서를 맺으며 국방 부문 배출을 통계에서 뺐다. 2015년 파리협정에서는 공식 면제 대신 내고 싶은 나라만 내도록 바꿨다. 그랬더니 하나 마나 한 통계가 돼 버렸다.
가령 이런 식이다. 군 배출량은 유엔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 가이드라인에 따라 에너지 부문의 미분류 항목(1.A.5)으로 집계된다. 여기에 뭘 넣고 뺄지는 개별국 마음이다. 그래서 군비지출 세계 77위 벨라루스의 배출량이 군비지출 7위인 독일보다 많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 수송부문 배출은 빈칸이다.
이런 어설픈 자료를 갖고서 ‘국제적 책임을 위한 과학자들’(SGR)이라는 단체는 전 세계 군사 배출량을 추정했다. 그랬는데도 결과는 27억5000만 톤이 나왔다. 만약 ‘세계국방’이라는 나라가 있다면 중국-미국-인도에 이어 4위에 올랐을 거란 얘기다. 각국이 공개한 배출량이 맞다 치고, 실제 전쟁에서 배출되는 양은 빼고 계산한 게 이 정도다.
총포가 오가는 전장의 배출이야 누가 알겠냐만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에서는 미궁을 헤집고 다니는 이들이 등장했다. 4개국 7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명 ‘전쟁 온실가스 회계 이니셔티브’라는 그룹은 지난해 11월과 올 6월 러우전쟁의 탄소발자국을 공개했다. 전쟁 발발 12개월간 1억2000만 톤이 나왔을 거로 추정된다. 덴마크,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의 2~3년 치 배출량이다.
방 안의 코끼리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조금씩 등장하면서 비슷한 내용의 논문도 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올들어 5개월 동안 과거 9년 치만큼의 논문이 나왔다.
사실 군 당국도 기후문제를 마냥 못 본 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전례 없는 폭우로 전략사령부 3분의 1이 물에 잠기거나(미국) 페르시아만 해수 온도가 군함 엔진 냉각수로 쓰기 힘든 상황(영국 등)이 벌어지면서 기후변화를 안보 위협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2050년이면 억 단위의 기후난민이 생길 것이란 전망도 잠재적 위협 요소다.
전쟁과 기후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당장 배출량을 어쩌진 못하더라도 이제 코끼리를 덮고 있는 투명 망토는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전쟁이 파괴하는 건 기후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