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모범사례는 습관적으로 ‘잘 사는 나라’에서 찾기 마련이다. 교육부 출입기자였을 때 마이스터교가 한창 이슈였다. 도제식 직업교육으로 제조업 강국의 토대를 쌓아 올린 독일이 모범사례로 제시됐다. 복지부에 왔더니 어린이집 입소전쟁이 한창이었다. 입소전쟁이 여성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그러니 누가 애를 낳겠냐는 서사의 끝엔 늘 북유럽과 프랑스의 복지 제도가 따라붙었다. 환경부를 출입했을 땐 ‘미세먼지엔 미국의 청정대기법’, ‘탈석탄엔 영국’, ‘에너지 전환으로 시끄러울 땐 독일의 탈핵 공론화’가 공식이었다. 선진국엔 시험 족보처럼 기출문제와 답안이 늘 구비돼 있었다.
그랬던 ‘모범 국가들’이 흔들리고 있다. 영국의 변화는 아찔하기까지 하다. 세계 최초 기후변화법 제정, 극적인 석탄 발전 감축으로 ‘타의 모범’이 됐던 영국이 2022년 10월 리시 수낵 총리 취임 후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영국 기후 대응 핵심기구인 기후변화위원회의 수장은 7개월째 공석이다. 2012년부터 10년간 위원회를 이끈 존 거머 의장 임기는 2022년 9월까지였다. 후임자 선정과 인수인계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영국 정부 요청으로 9개월 임기를 연장했음에도 지난해 여름부터 여태 이 자리는 비어 있다. 영국 정부는 또 내연기관차 판매 중단, 건물 에너지효율화, 석유 보일러 판매 금지, 육류 소비 축소안 등을 줄줄이 취소하거나 미뤘다. 영국의 기후 리더십은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
대서양 건너편에는 반전의 반전이 대기하고 있다. 2021년 1월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일성은 “미국이 돌아왔다”였다. 취임 직후 첫번째 행정명령으로 파리협정에 재가입해 국제사회에 미국의 복귀를 알렸다. 그리고 탄소중립과 경제정책을 굴비처럼 엮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내놨다. ‘탈탄소엔 전기차, 전기차엔 보조금, 보조금은 미국산에’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 멀리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달려오고 있다. 그는 공약 홈페이지에 이번에도 파리협정 탈퇴를 밝혔다. 2017년 탈퇴 선언 땐 ‘발효 후 3년+공지기간 1년’이라는 규정 때문에 무위에 그쳤지만 협정 발효 9년 차인 이번엔 다르다.
유턴하는 영국, 흔들리는 미국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그럼 그렇지’ 하는 실망감? ‘우리만 이런 게 아니군’ 하는 안도감?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도 두 나라가 부럽다. 올해가 선거의 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두 나라엔 기후정책에 안테나를 세운 두터운 유권자층과 독립적인 싱크탱크, 그들을 의식하는 정치권이 있다. 그 힘으로 십수년 간 온실가스를 줄여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말로 도도한 국제사회 흐름을 거스를지, 말만 그렇게 하고 바이든표 정책을 다시 쓸지 알 수 없다. 참고로 트럼프 정부 때 온실가스는 특별히 늘지 않았다. 트럼프가 ‘똑똑하다’고 칭찬한 수낵 총리의 유턴 정책은 올가을로 점쳐지는 총선에서 14년 만에 정권을 잃을 것 같다는 위기감의 발로라는 분석이 많다.
총선까지 90여일 남겨둔 한국. 이번에 뽑힌 국회의원 임기는 2028년까지다. 2026년 유럽 탄소 국경조정이 본격 시행되면 탄소 가격을 남의 나라에 세금처럼 내야 할 판이다. 2028년엔 기후공시도 시행 n년 차에 들어가야 하고, 태양광과 풍력은 지금보다 각 1.6배, 4배 늘어나야 한다. 그사이 폐쇄될 석탄발전소 노동자 문제는 어떻게 하나…. 다음 국회가 풀고, 감시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들리는 거라곤 누가 제3 지대 합류하고, 쌍특검법이 총선에 어떤 영향을 줄지, 하는 정치공학 얘기뿐이다. 거대 양당 모두 환경분야 인재를 영입했으니 뭔가 준비 중일 거라 믿어본다. 남의 나라 모범답안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 우리도 스스로 족보를 채워나갈 때도 됐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