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서 24일(현지시각) 폭격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으려 기다리고 있다. 칸유니스/AFP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정희원|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참혹한 소식이 이어지던 어느 늦은 밤, 절친한 활동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꽤 긴급한 모양이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배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하마스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이스라엘도 나쁘지만 팔레스타인도 나쁘다”는 양비론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둘 다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사태가 깨끗한 진공관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런 의견도 일리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스라엘이 살해한 민간인 수가 월등하게 더 많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접근이 어려워 가짜 뉴스가 난무하니 하마스의 잔혹행위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억눌린 민족을 대변해 식민권력에 맞서는 하마스의 폭력은 무조건 정당하다고 외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새로운 하마스의 출현을 막아낼 유일한 길은 바로 팔레스타인의 해방이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바로 지금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고 말해야 한다.
1948년 땅을 빼앗긴 채 강제 이주를 당한 이후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얼마 전 가자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겨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단 병원들이 자체 발전기를 돌릴 수 있겠지만 그 연료도 며칠 뒤면 바닥난다고. 가자지구 전체가 암흑에 빠져 이제는 모든 민간인의 생존이 위태롭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우리는 왜 묻지 않을까. 전시 상황에 물, 가스, 전기가 없는 것은 당연해서? 전쟁 중에 발전소를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
지상전이 전개되기도 전에 왜 발전소가 멈추는가. 그것은 애초에 연료 공급도, 전기 공급도 이스라엘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기 공급의 3분의 2는 이스라엘이 통제하며, 나머지 3분의 1을 담당하는 가자지구의 유일한 발전소는 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이 폭격한다. 그래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었던 날이 없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2018년 일평균 7시간, 2019년 일평균 12시간 동안 전기를 쓸 수 있었다. 그나마 올해에는 전쟁 전까지 하루 13시간이나 전기가 공급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것인가? 물론 이스라엘은 발전소에서 사용할 연료를 포함해 다른 물자의 공급도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자지구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최소한의 의식주도, 이동의 자유도, 언어와 문화를 지킬 자유도, 직업 선택의 자유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도. 당신은 이런 삶을 수십년간 버틸 수 있겠는가? 오늘 태어난 내 아이가 기약 없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식민 통치자의 변덕과 보복에 좌지우지되는 삶은 어떤 삶인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비상사태에 태어나, 평생을 비상사태로 살다가, 그렇게 비상사태를 맞아 죽는다. 이렇게 지옥이 일상이 되고, 위기가 영원이 되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강자의 편에 서는 자들의 공모, 그것만 있으면 된다.
한때 우리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지 묻지 않았던가. 마치 봄이 오듯 저절로 해방이 오지 않으며, 식민권력이 선의로 계획을 바꿀 리 없다. 세계의 권력자들과 결탁한 이스라엘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은 맞서 싸워야 하고, 우리는 모두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운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이 끝없는 폭력을 종식시키고 세계 여론의 지형도를 바꿔낼 것은 우리의 연대뿐이다.
어차피 죽은 목숨으로 살고 있는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은 저항할 수밖에 없다.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한 채 평화의 이름으로 부당한 강요를 받느니, 차라리 피지배자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 지배자와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절박한 투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하마스를 핑계로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회피하지는 말자. 비폭력은 팔레스타인에 강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비폭력의 세계를 앞당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이므로, 이제 함께 외치자. 팔레스타인에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