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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자 학살’ 이후의 세계 [아침햇발]

등록 2023-10-26 11:30수정 2023-10-26 18:38

24일 가자지구 칸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부상당한 남성이 아기를 꼭 안은 채 치료를 받고 있다. 칸유니스/AFP 연합뉴스
24일 가자지구 칸유니스의 나세르 병원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부상당한 남성이 아기를 꼭 안은 채 치료를 받고 있다. 칸유니스/AFP 연합뉴스

박민희ㅣ논설위원

2023년 10월18일은 미국 주도 국제질서의 쇠락을 상징하는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방문해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포옹하고,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지지했다. 같은 날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 구호품 전달을 위한 ‘인도주의적 전투 중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브라질이 제출한 이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14개국 중 미국이 유일했다.

다음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집트 총리와의 회담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즉각 휴전을 촉구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이스라엘의 대응은 자위권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온 것은 수십년 된 ‘관행’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패권 경쟁과 맞물리면서 길고 강력한 여진을 일으키고 있다.

첫째,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이중잣대’를 들이대면서 ‘두 개의 전선’ 모두에서 명분을 잃었다.

이스라엘 방문에서 돌아온 바이든 대통령이 19일 백악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적들의 위협을 받는 민주주의’라 부르며 대규모 군사지원을 다짐한 것은 참으로 기묘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았고 가혹한 식민 지배를 해왔다. 미국은 러시아의 민간인 공격과 학살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탄하고 제재해왔다. 이스라엘은 벌써 20일째 가자지구 주민 230만명의 물과 식량, 전기, 의약품 공급을 끊고 무차별 공습으로 6500명 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살해와 인질 납치에 함께 분노하고 아파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가자지구에서 계속되는 학살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 정치가인 무스타파 바르구티는 “왜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점령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면서, 중동에서는 우리를 계속 점령하고 있는 점령자를 지지하는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함께 막아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지키자며 동맹을 규합해온 미국 외교의 토대는 무너질 것이다.

둘째,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인 ‘글로벌 사우스’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즉각 휴전 촉구” 발언 이후 자이쥔 중국 중동문제 특사가 중동을 방문해 “민간인을 해치고 국제법을 위반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면서 ‘중재자’로 나섰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후원자로 비판을 받아온 중국이 ‘피스메이커’ 이미지로 변신하고, 중동에서 친중국 여론을 넓히려는 계산이다.

중국이 자국 내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무슬림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모순이 분명하다. 중동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막강하지만, 중동 국가들의 안보 문제를 해결할 중국의 능력과 외교력은 제한적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미국의 위선에 대한 분노가 커질수록, 중국을 대안으로 받아들이려는 흐름은 확대될 것이다.

셋째, 미국 외교 정책이 국내 정치의 한계에 매몰되는 현실이 분명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에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전쟁터를 직접 누비는 외교전문가 바이든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미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친이스라엘 세력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국제적으로,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외교·안보 담당자들은 미국의 일방적 이스라엘 편들기가 큰 역풍을 일으키고 미국의 외교 전략에도 심각한 손실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유럽연합 지도자들까지 연일 이스라엘의 과도한 행태를 비판하며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지상전을 중단시키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존을 향한 대안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없다. 미국 내 친이스라엘 세력과 유대인 로비단체의 막강한 영향력과 국내 정치적 이해득실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매년 이스라엘에 33억달러(4조4335억원)의 군사 원조를 해왔으며, 이번 하마스 공격 이후 즉각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공격용 무기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공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할 것이다. ‘하마스 제거’를 내세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최대한 쫓아내고 가자지구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 아니, 세계가 ‘지상전은 언제’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 민간인들이 죽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빼앗는 것을 막는 것이 국제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던 미국은 이 학살을 멈추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자지구 아이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더욱 참혹한 지옥도를 만드는 데 무기와 돈을 지원하고, 분노에 불을 붙이면서, 그 고상한 ‘국제질서’가 도대체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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