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군복을 입고 있을 때부터 신원식 국방장관은 기자들에게 말을 잘했다. 골치 아픈 일이 터지면 “설명하기 제한된다”며 입을 닫는 대다수 국방부 고위당국자나 장군들과는 달랐다. 신 장관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중장)을 할 때는 비판적인 기사를 쓴 기자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사실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합참 실무자가 군사 비밀 유출을 우려하자 그는 “생각이 다른 기자와도 신뢰를 쌓으려면 적극 소통해야 하고, 민감한 사안은 엠바고를 걸고 설명하면 보안 누설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국방부 장관에 취임해서도 언론친화적인데, 최근 이례적으로 기사를 문제 삼았다. 신 장관은 지난 23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정부의 9·19 남북군사합의 일부 효력정지는 남북합의를 남측이 먼저 깬 첫 사례’라는 경향신문 보도를 두고 “강도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에 입각한 편향된 기사”라고 주장했다. 한겨레도
남북 당국 간 첫 문서 합의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합의서의 효력을 공식 정지시킨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 장관은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잘못하면 ‘서울 신드롬’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문제의 본질을 다르게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비판하는 보도가 ‘북한을 옹호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보도의 본질을 헛짚은 오해다. 한겨레, 경향신문 보도의 핵심은 한반도 긴장이 높아져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피 흘리는 비극을 막기 위해, 남북 군사 대화 채널을 복원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신드롬’이란 신 장관의 신조어도 과녁을 벗어났다. 한국이 맥없이 북한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 주장이다. 이에 동의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무리 비유적인 표현이라도 한국이 인질이란 상황 설정은 나라를 지켜야 할 국방장관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패배주의적인 발상이다.
그는 지난 23일 국회 국방위에서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는 평화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나는 신 장관의 의견을 존중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특정한 시각에 입각한 하나의 상황 해석일 뿐 정답은 아니다.
9·19 군사합의의 핵심은 우발적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도록 남북 접경 지역 땅·바다·하늘에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70년 넘게 날카롭게 대치하던 남북이 뒤로 물러서는 방식이다. 비유하자면, 증기로 가득 찬 압력밥솥이 폭발하지 않도록 하는 응급조처 성격인 김 빼기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힘에 의한 평화’나 9·19 군사합의 일부 효력정지는 무기를 들고 상대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방식이다. 그러다 북한이 도발하면 어떻게 할지 궁금해진다. 지난달 7일 신 장관이 취임사에서 밝힌 대답은 ‘즉강끝 원칙’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즉시 강력히 끝까지 응징하라”는 것이다. 지난달 9일 신 장관이 최전방 부대인 육군 1사단을 방문했을 때 현장에 있던 장병들이 대대장의 선창에 따라 “리멤버! 즉강끝!” 구호를 제창했다.
‘즉강끝’ 구호는 일선 전투부대 대대장이 부하들의 전투 의지를 고양시킬 때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구호가 대한민국 국방장관의 한반도 위기관리 전략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이들은 군대를 ‘싸워서 이기는 전투조직’으로 정의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존재하는 더 본질적인 이유는 전쟁을 억지하기 위한 것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그 후의 문제다. 누군가 우리를 침략하는 그 순간 군대는 ‘실패’한 것이다. 적이 공격해도 될 만큼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최영진 중앙대 교수)
신 장관은 신조어, 구호가 아니라 전략과 정책을 고민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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