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반대 서명 전달 및 100인 국회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한겨레 프리즘] 방준호 | 노동·교육팀장
당시 그는 정년을 앞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했다. 회사에 그대로 머물다 정년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소사장 회사에 들어갈 것인가였어요.” “뭐라고요?” “소.사.장.”
동력장치 부품만 40년 만든 노동자인 그가 1년 전 꼭꼭 되짚어주기 전까지 소사장제의 존재를 오래 잊고 있었다. “우리 반(팀)이 통째로 분리돼 작은 새 회사가 되는데, 하던 일은 그대로 하는 겁니다. 반장이 소사장이 되고 우리는 직원이 되죠. 처우만 사내하청처럼 바뀌는 거예요.”
‘작은’(小) 사장이라니, 꽤 직설적인 단어다. 1960년대부터 존재한 제도다. 정규직이 팀 단위로 분사해 소규모 사내하청 소속으로 신분이 바뀐다. 단어 모양만큼 적나라한 외주화다. 3저 호황이 저문 1990년대 초, 외환위기 뒤인 1990년대 말 극성했다. 정리해고보다 한치 낫다는 이유였다. 요샌 정년퇴직을 앞둔 공장 노동자한테 같은 선택지가 빈번히 놓인다고 한다.
나이 예순 언저리인 그한테 이 괴상한 이직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만큼은 정년 지나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대체로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일 얘기를 할 때면 표정이 싹 바뀌어 다루는 기계들의 이력이랄지 초짜와 고수의 차이를 진지하게 열거하곤 했다. 여느 베테랑, 장인처럼 ‘일 자체’에 자부심이 번득였다.
그렇게 그는 300명 규모 공장 정규직 노동자에서 10명 안팎 소기업 비정규직이 됐다. 대신 일을 지켰다. “괜찮은데요. 좀 서글퍼”라고 그가 툭 이직의 감상을 전했다. 종잡기 어려워 맴돌았다. 올해 고용지표와 정책 앞에 그 복잡한 마음을 종종 떠올렸다.
돌연 소기업 노동자가 된 그의 처지는 최근 노동시장의 제유다.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작은 기업에 쏠린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제조업 30인 미만 사업체 노동자는 한해 전보다 월평균 3만9천명 늘었다. 같은 기간 30인 이상 제조 사업체에서 늘어난 취업자는 2천명이 채 안 되며, 그나마 7월부터 감소로 돌아섰다(사업체노동력조사). 대기업은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 소기업은 사람이 없어 아우성인 모순이 어느덧 익숙하다.
작고, 더 작은 기업으로 인력 수요가 몰리는 와중에 정부는 소기업에 ‘제도적 차별’을 얹고 있다. 1월27일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될 예정인데, 법을 개정해 2년 더 미룰 태세다. 주 최대 52시간제는 ‘30인 미만’ 사업장에선 정착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 30인 미만 사업장의 8시간 추가연장근로(최대 주 60시간 근무)를 예외적으로 허용한 제도가 예정대로 사라지자, 고용노동부가 갑자기 ‘계도기간’을 선언해 법 집행을 유예한 탓이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이 모든 규정의 바깥에 있다.
50인 미만, 30인 미만, 5인 미만. 하는 일은 같아도 수행하는 기업이 작아질수록 사람에게 드는 ‘과로 비용’, ‘생명 비용’이 덜 드는 구조를, 정부는 법을 거슬러 지속하고자 한다. 최첨단 설비보다 사람의 힘과 기술이 중요한 일에 있어, 작은 기업은 저비용으로 말미암아 노다지가 되고 있다.
“우리 같은 고령자나, 잠시 머무는 외국인 아니면 이제 누가 여기서 이 일을 하겠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기업 규모에 따른 노동자 차별은, 나아가 일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가 40년 해온 ‘일’은 소기업으로 옮겨졌다는 이유만으로 주 최대 52시간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일, 중대재해도 가벼운 처벌로 무마되는 일, 사람의 가치를 저렴하게 셈하는 게 관건인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일을 이제 누구도 자신처럼 하고 싶어 할 것 같지 않았다. 이 일을 자부하는 ‘최후의 장인’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괜찮고, 또 서글펐을 것이다. 정년 이후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당장의 안도는 잠시, 온 인생이었던 나의 일이 겪는 수모와 앞날이 이내 안쓰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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