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속 전두광(황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유튜브 갈무리
[똑똑! 한국사회]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12·12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전두광(전두환)은 인상적이었다. 차갑고 비인간적인 독재자가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출에 힘입어 광적인 야망을 끝없이 밀어붙이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두환은 어마어마한 부정 축재를 통해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묘사한 금력과시형 유한계급에 진입했다.
“당파심, 당당한 체격, 잔인성, 악랄함, 집요함…. 이상적인 금력과시형 남자는 또한 약탈적인 인간성이 수반되는 변종 중 한 종이라는 점에서 이상적인 범법자와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는 재수, 주문, 점, 운명, 징조나 예감, 샤머니즘 의식 따위에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베블런에 따르면 약탈 문화에서의 노동은 주인에 대한 복종과 결부된 유약함과 열등감의 표시일 뿐이다. 유한계급은 이런 비천한 노동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진다. 어떤 경제적 압박도 느껴본 적 없이 과시적 소비를 일삼는 그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들은 계급의 세력과 본능의 힘으로 불완전한 기존 제도를 영구히 유지하면서 때로는 더욱 반동적인 과거로 회귀한다. 한편, 모든 힘을 매일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써야 하는 절대 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에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전두환의 전통이 남아서일까? 현존하는 권력은 금력과시형 유한계급과 한마음이 되어 ‘노조법 2, 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가히 권력의 과시적 남용이라 할 만하다. 반노조적인 미국조차 복수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하청·간접고용·특수고용 노동자가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사법권력은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의 기원이 된 사망 사고에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원청 불패의 현실을 완성했다. 정부와 여당의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유예 시도는, 원청보다 하청업체 노동자의 사고 사망률이 현저히 높고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재해율이 높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다.
이러다 초저출생과 산업 현장에서 사고사, 과로사, 과로 자살, 각종 재해와 질병으로 노동자가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정부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 문제 없다. 이민청을 만들어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면 되니까. 이미 손쉽게 외국인 가사노동자에게 돌봄을 맡기는 실험을 하는 중이다. 왜 정부가 수고스럽게 아이를 돌보고, 일하는 여성과 남성을 지원하는 책임을 져야 하겠나. 왜 정부가 영세기업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힘든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더 기진맥진해질수록 진보와 혁신도 막을 수 있다.
최상층의 삶의 양식이 공동체의 규범으로서 낮은 계급의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무엇처럼 부과됨에 따라 과시적 소비가 사회 전체적으로 재생산된다. 노예와 하인이 없어진 근대사회에서는 남편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대리 소비가 부인에게 집중되는데, 과시적 낭비는 종종 명품을 선호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아름답더라도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본래의 가치 이상으로 비싸서 우월한 만족감을 주기만 한다면, 그 상품을 팔기 위해 명품 회사가 무슨 짓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디오르는 여러 차례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광고로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싼 것을 높이 여기고 싼 것을 경멸하는 사고가 너무나 철저히 각인된 탓인지 디오르 가방 수수 의혹을 받는 대통령 부인을 포함하여 이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의소리’는 지난달 27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최재영 목사가 김건희 여사에게 고가의 명품 가방을 선물했다는 내용의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의소리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베블런은 역사가 앞선 기술과 낡은 제도 간의 충돌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그는 피에르 부르디외를 만난다. 부르디외는 계급 간 갈등이 상징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징 투쟁은 ‘정당한’ 세계관을 생산하고 또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과시적 소비 대신 노동과 돌봄의 고귀함이, 구별 짓기 대신 평등과 공존, 연대의 가치가 중시되는 세계관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