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범죄 사건 보도 기준을 세워야 할 때

등록 2024-01-15 18:30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지난 12일 오전 열린 ‘고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요구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맨 앞줄 오른쪽)이 성명서를 읽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이선균 배우의 사망 소식을 접한 순간 귀 곁에 머물던 소리들이 흩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친분이라곤 전혀 없는 타인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동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이 비극에 대한 책임이 내게도 있음을 인식해서가 아니었을까.

‘고 이선균 배우는 사회적 타살을 당했다’는 외침에 동의한다. 그가 받았던 수사 관련 기사들을 자세히 읽지 않았음에도 나는 수사 진행 상황과 이를 둘러싼 사생활 논란들을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말 속에 홀로 서 있어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있었고, 이를 허용한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인 내게 책임이 없을 리 없다.

범죄 사건 보도는 공적인 필요성을 가진다. 사회에서 발생한 범죄 사실과 규범적 책임 내용을 구성원들에게 알리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인 사회구조에 관한 비판적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차별적 사회구조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가 범죄 피해를 보았을 때 공정한 형사사법절차가 실행되도록 공론을 형성하고, 권력자의 부정·부패가 발생하였을 경우엔 그 책임 추궁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시민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공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범죄 사건 보도는 피의자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국민의 기본권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깨뜨릴 위험이 크다. 보도 경쟁이 과열되면 언론은 기사의 화제성을 높이기 위해 사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피의자를 거악으로 단정하고 몰아가기 쉽다. 수사기관이나 고소인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범죄 혐의와 무관한 주변 사실을 보도하고, 그 과정에서 사생활 정보를 무분별하게 공개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실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고 편집하여 독자들이 혐의 사실의 불법성과 피의자의 유죄를 확신할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피의자는 실제 모습보다 전형적이고 단순화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범죄 사건 보도는, 허위 사실 보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피의자의 명예와 사생활의 자유 등 인격권을 침해하고 재판에서 다투어야 할 쟁점들에 관하여 피의자가 어떠한 방어권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를 상대로 끝없이 항변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실제 독일에서 2009년 법관들과 검사들을 상대로 경험연구를 했는데, 범죄 사건 보도가 공판정의 분위기, 증인의 진술, 절차의 진행, 형벌의 상한, 집행유예 인정 여부 등에 있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범죄 사건 보도의 공익적 기능은 살리고 위험성은 줄이기 위하여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는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와 증인의 신원 공개, 피의자의 유죄를 확신시킬 위험이 있는 수사 정보나 고소인 진술의 일방적 공개, 수사기관의 의견 공개 등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의 자율규제가 실시되고 있다. 우리 대법원도 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언론은 익명 보도를 원칙으로 삼고, 널리 알려진 인물의 범죄 혐의라 하더라도 사적 영역에서 발생한 사안이라면 사생활의 자유를 더 존중하여야 하며, 고소인의 일방적 주장을 여과 없이 인용하거나 주변 사정을 무리하게 연결해 마치 범죄 혐의가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하였다.

범죄 사건 보도에 대한 통제 필요성은 오랜 기간 논의되었으나 현실에서는 무력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언론뿐만 아니라 개인의 에스엔에스(SNS)를 통해서도 무분별하게 정보가 유통되고 있어 통제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우리는 범죄 사건 보도의 공익성과 피의자의 인격권 및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사이의 균형에는 무관심해하다가, 대중에 널리 알려진 배우가 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사 상황과 사생활 정보가 전면적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을 방치하여 결국 소중한 생명 하나를 잃었다. 그는 재판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상대로 자신의 입장을 끊임없이 항변해야 했으며, 범죄 혐의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극히 사적인 사정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중단되어야 한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사 과정에서의 범죄 사건 보도와 정보 유통의 실효적인 기준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가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1.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윤-한 회동, ‘두 검사’의 잘못된 만남 [아침햇발] 2.

윤-한 회동, ‘두 검사’의 잘못된 만남 [아침햇발]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3.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4.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정치인은 죽고, 시인은 살게 하라 [세상읽기] 5.

정치인은 죽고, 시인은 살게 하라 [세상읽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