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24시팀 기자
아침햇발
미란다 대 아리조나
1966년 미국 애리조나에서 붙잡힌 강간범 어네스트 미란다의 재판에서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은 형사절차법의 신기원인 미란다 원칙을 빚어냈다. 흔히 묵비권과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로 ‘잘못’ 알려진 이 원칙은, 정확히 말하면, 경찰조사 때 입회한 변호사의 조언을 받을 권리와 돈이 없으면 국선 변호인을 선임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핵심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권리들이다.
이토록 획기적인 원칙이 사회적 거부감에 부딪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196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닉슨은 “너무 나간” 대법원을 비난했고, 압승을 거둔 그는 약속대로 대법관들을 바꿔나갔다. 그러나 이후 보수화한 대법원도 미란다 판례를 깰 수 없었다. “그 힘은 이 원칙이 소수인종 등 약자를 보호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미국의 한 법학교수) 대법관의 첫째 덕목은 ‘해박한 법률 지식’보다는, 시대를 앞서 인권의 가치를 식별하는 밝은 눈이 아닐까.
올가 텔리스 대 뭄바이 시영회사
서울에서도 철거민들이 속출하던 1980년대, 인도 뭄바이(당시 봄베이)에서도 빈민촌 정리사업이 진행됐나 보다. 85년 철거민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찬드라추드 대법관은 이렇게 판결문을 시작한다.
“거리를 집 삼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은 보지 않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썩은 고기를 찾는 개들과 굶주린 쥐를 쫓는 고양이들이 그들의 이웃이다. 그들은 용변을 보는 곳에서 음식을 끓이고 잠을 잔다. 다 큰 딸들은 여성의 수치심도 느낄 겨를 없이 행인들의 곁눈질에 드러난 채 목욕을 한다. 요리하는 여인들은 서로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고, 아이들은 구걸에 나선다. … 이런 비참한 삶의 터전마저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이 소송의 원고다.”
핍진한 묘사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이 느껴진다. 그는 “주거권은 생명권의 일부”라는 헌법 해석을 통해 원고들에게 적절한 주거시설을 제공할 것을 행정부에 명령했다. 정책의 문제로 치부돼 온 주거·의료 등 복지적 권리를 사법부가 판결로 보장하려 한 태도는 국제 인권법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위헌 결정 하나로 수많은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강물로 뛰어드는 현실에서, 우리에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최고 법관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 대 마콰냐네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진 뒤 남아공의 93년 과도헌법은 인권과 평등의 정신을 담으려 노력했음에도 사형제에는 침묵했다. 대신 헌법재판소가 2년 뒤 위헌 결정으로 사형제에 종언을 고했다. “사형제는 국민투표식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는 소수자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사법부의 구실이다. 가장 악한 자와 가장 약한 자의 권리까지 보호할 의지가 있을 때에만 우리의 권리는 온전히 보호받는다.”(차스칼슨 재판관) 전관 대 저스티스 대법관을 뜻하는 ‘저스티스’는 정의라는 뜻도 갖거니와, 실제 이들은 정의의 화신인 양 존경받는다. 많은 저스티스들이 정의와 인권을 옹호한 명판결을 남겼고, 외국의 법대생들은 이를 곱씹고 곱씹는다. 조만간 임명될 새 대법관 다섯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판결들을 가져 보기를 소망한다. 혹 그것이 ‘너무 나간’ 꿈이라면, 적어도 이런 최악의 문장을 쓰는 대법관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저는 대법관을 끝으로 정든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새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저스티스’가 아니지 않은가.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진 뒤 남아공의 93년 과도헌법은 인권과 평등의 정신을 담으려 노력했음에도 사형제에는 침묵했다. 대신 헌법재판소가 2년 뒤 위헌 결정으로 사형제에 종언을 고했다. “사형제는 국민투표식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는 소수자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사법부의 구실이다. 가장 악한 자와 가장 약한 자의 권리까지 보호할 의지가 있을 때에만 우리의 권리는 온전히 보호받는다.”(차스칼슨 재판관) 전관 대 저스티스 대법관을 뜻하는 ‘저스티스’는 정의라는 뜻도 갖거니와, 실제 이들은 정의의 화신인 양 존경받는다. 많은 저스티스들이 정의와 인권을 옹호한 명판결을 남겼고, 외국의 법대생들은 이를 곱씹고 곱씹는다. 조만간 임명될 새 대법관 다섯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판결들을 가져 보기를 소망한다. 혹 그것이 ‘너무 나간’ 꿈이라면, 적어도 이런 최악의 문장을 쓰는 대법관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저는 대법관을 끝으로 정든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새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저스티스’가 아니지 않은가.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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