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정치팀 기자
아침햇발
“이 별은 이제 1분마다 바뀌고, 이제 나는 잠시도 쉴 시간이 없어. 매분마다 나는 가로등을 켰다가 꺼야 해!”
친구를 찾아나선 ‘어린왕자’는 다섯째 별에서 가로등과 점등수를 만난다. 점등수는 아침에 가로등을 끄고, 저녁에 켰다. 낮엔 쉬고, 밤엔 잤다. 그런데 이 별의 하루가 점점 짧아졌다. 이젠 1분마다 하루가 돌아온다. 점등수는 1분마다 가로등을 켰다 끈다.
주위를 둘러봐도, 확실히 요즘은 다들 바쁘다. 예전보다 더. 무척이나 애를 쓰고, 그게 가치있는 삶이 된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새벽종이 울렸네” 시대의 가치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한겨레>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흉(?) 좀 보자. 지난달 갑작스레 생면부지 정치팀으로 발령이 나자,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휴가 못 가겠네!” 또다른 선배는 몇 해 전 이렇게 꾸짖었다. “왜 예전처럼 몸을 던지지 않느냐?”고. 또또 다른 선배는 ‘취미가 뭐냐’는 물음에 “일이 곧 취미”라 답했다. 또또또 다른 선배는 <서경>에서 따온 말을 전하며, “‘사람은 무일(無逸, 편안함이 없음)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또또또또 다른 선배는 특파원 시절, 저녁을 먹으면서도 한 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뉴스를 들었다고 한다. 또또또또또 다른 선배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전쟁”이라고 말했다. 또또또또또또 다른 선배 같은 후배는 “목숨 걸고 일해 봤냐?”고 눈을 부라렸다. 무섭다. 이들은 매번 나를 ‘부지런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에 빠뜨리게 만든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면,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인 것 같다. 자본이 없는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얻고자 치를 수 있는 건 노동력이고, 이는 결국 ‘시간’, 내 목숨이다. 후배 말이 아니더라도, 우린 누구나 의도와 상관없이 ‘목숨 바쳐’ 일하는 셈이다.
몇 해 전부터 지친 직장인들 사이에선 ‘재충전’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그런데 재충전이란 게 결국은 더 잘 ‘일하기’ 위한 것 아닌가? 얼마 전 남중수 케이티 사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휴가를 권하며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감명받았다. 일하기 위해 노는, ‘재충전’에 견주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러나 남 사장은 그 전자우편에서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고 말해, 감명에 한계를 그어버리긴 했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에서 “불편함이야말로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 상처받는 것”이라면서도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30 정도의 여유와 여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된다”고 말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라는 <주역>의 문장도 인용하며 여유공간 갖기를 권했다.
슬럼프에 빠진 박지은은 “골프가 안 될 땐 골프채를 잡지 말라”는 코치 말에 따라 두 달 넘게 쉬고 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이 땅의 샐러리맨들이 박지은이 될 순 없을 터이나, 그저 1주일 남짓 휴가라도 마음 편히 지내길 빌어본다. 우리네 휴가란 것이 대전역에서 잠시 내려 허겁지겁 밀어넣는 가락국수 한 접시 같긴 하지만.
어떤 글에 보니, 인디언은 말타고 달리다가 문득 멈춰서곤 한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제대로 따라오는지를 보기 위해. 권태호/정치팀 기자 ho@hani.co.kr
어떤 글에 보니, 인디언은 말타고 달리다가 문득 멈춰서곤 한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제대로 따라오는지를 보기 위해. 권태호/정치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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