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언 도쿄특파원
아침햇발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의 저서가 지난달 20일 출간됐습니다. 출판사가 ‘긴급출판’이라며 정치인 책으로는 드물게 곧바로 문고판을 펴냈습니다.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제목은 조국애가 넘치는 장관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구체적 정책제언보다는 장관의 정치사상과 국가관에 무게가 실린 책입니다. 차기 총리가 확정적이어서 이 책은 단번에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습니다. 출간 당일 히로히토 전 일왕의 ‘야스쿠니 발언’ 메모가 보도되고, 다음날 유력 경쟁자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이 출마를 포기했습니다. 인과 관계가 명확치는 않지만, 책은 이미 제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장관 스스로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낸 책이라고 단언한 만큼, 아베 정권의 출범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몇마디 논평을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유심히 들여다본 대목이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장관의 인식입니다. 주변국 관계에서 역사 문제를 비켜갈 수 있는 길은 없거니와, 이 문제가 지금 최대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장관은 태평양전쟁과 관련해 “분명히 군부의 독주가 있었다”면서도 “매스컴을 포함해 국민 다수가 군부를 지지한 것 아닌가”라며 전쟁책임을 모호하게 했습니다. 전쟁책임자인 에이(A)급 전범이 “지도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에이급으로 불렸을 뿐, 죄의 경중과는 관계가 없다”며 감싸기에 나섰습니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에이급 전범들이 뒤에 일본 정부에 의해 사면받은 점을 들면서 “국내법에선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국민 총의로 결정했다”는 논리까지 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참혹한 고통으로 몰아넣은 전쟁범죄자들을 일본 스스로 단죄하기는커녕 미군정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사면한 게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은 “도쿄 전범재판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신조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 있다”고 평하더군요.
장관은 책에서 “북한이 일본에 미사일 공격을 해올 가능성이 극히 적다. 미국이 곧바로 반격할 것이기 때문에”라고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에는 ‘적 기지 공격론’까지 들먹이며 소동을 벌여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북한에 경제제재를 하면 주민들부터 굶게 된다’는 비판에, “조개 수출이 막히면 그 조개가 주민들의 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한 대목은 헛웃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일왕의 통치를 기원하는 ‘기미가요’가 세계에서도 드문 비전투적 국가라거나, 일본의 근간은 천황제라는 말은 전후 세대 뉴리더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쟁에 휘말릴 우려를 한층 높여줄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용인이 되레 무력행사 가능성을 줄일 것이라는 주장은 이라크 사태 등에 비춰 궤변에 가깝게 들립니다.
장관은 지난 4월 야스쿠니 신사에 ‘도둑 참배’를 했습니다. 지금도 참배 사실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피하고 있습니다. 책 머리말에서 자랑스럽게 얘기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우는 정치가’라는 자화상을 무색하게 하더군요. 그런 만큼 장관의 고민이 컸으리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참배가 지도자의 책무”라는 공언을 되풀이해와 궤도수정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이 집권 뒤 참배 자제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동안 아베 장관 앞에는 늘 ‘극우’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런 표현을 한국에서도 흔쾌히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박중언 도쿄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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