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24시팀 기자
아침햇발
일본 최고재판소는 1957년 음란물의 판단 기준을 세운다. “필요없이 성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고 보통사람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치고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 우리나라 대법원이 95년까지 유지한 음란성 판단 기준은 이렇다. “성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키고 일반인의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것.” 낯익다.
최고재판소는 80년 표현의 자유를 넓히기 위해 모호했던 기준을 다음의 5가지로 구체화한다. ①성행위 묘사의 상대적인 노골성과 표현방식 ②성적 묘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③작품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성적 묘사의 관계 ④작품의 예술성과 지적 내용이 성적 자극을 완화시키는 정도 ⑤성적 묘사와 이야기 구조 및 서술의 관계. 우리나라 대법원은 95년 새로운 음란성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성에 관한 노골적이고 상세한 표현의 정도와 그 수법, 성에 관한 표현이 간행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및 관련성, 간행물의 구성이나 전개 또는 예술성·학문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의 완화 정도, 이들의 관점으로부터 간행물을 전체로서 보았을 때 주로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우는 것으로 인정되는지의 여부.” 전반부는 낯익다. 아래를 보면 후반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음란물 판단기준은 오랜 진화 끝에 73년 확립된다. ①평균적인 사람이 현재 그 지역의 기준으로 작품을 전체로서 보았을 때 호색적 흥미에 호소하느냐 ②특정 유형의 성적 행위를 혐오감을 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느냐
③작품이 전체적으로 보아 진지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과학적 가치를 지니느냐.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98년에야 음란성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 역시 낯익다.
외국의 음란물 판단 기준은 오랜 법적 논쟁의 산물이다. 그 논쟁은 사회의 보호와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 충돌을 좀더 세련되게 조정하려는, 참신하고 진취적인 대법관(재판관)들의 소수의견이 이끌었다. 다수의견을 넘어서려면 논리는 더 정교하고 표현은 더 호소력 있어야 했다. 그런 노력 끝에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의 자리에 올라서는 과정의 반복, 그것이 법률 선진국의 판례 변천사다.
새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된 이가 냈던 단 3개의 소수의견이 그를 반대하는 비분강개의 근거로 제시되는 현실을 보며, 우리 법률문화의 후진성에 다시 놀라게 된다. 신행정수도 위헌 사건에서 ‘수도=서울’이 관습헌법이라는 다수의견에 유일하게 반대한 게 문제되는데, 이처럼 법률적 모험에 가까운 파격적 판례에 소수의견 하나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과연 다양성이 숨쉬는 나라일까? 앞으로 헌재소장은 정부 쪽을 옹호하는 소수의견을 한번도 내지 않은 사람 중에 골라야 한다는 말인가? 도무지 모르겠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옹호한 소수의견은 이미 31개 문명국가에서 다수의견이다. 또 적법한 노동쟁의에 한해서만 제3자 개입을 허용하자는 절충적 의견을 낸 게 ‘이념적 편향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지. 미국에선 연방대법원장도 흔히 소수의견을 낸다. 권위보다 논리로 말하기 때문이다.
전효숙 재판관의 헌재소장 지명에 거품을 물던 이들이 나머지 재판관 인선엔 조용한 걸 보니, 새로 구성될 헌재에서도 생기 꿈틀거리는 소수의견을 많이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냥 몇십년 전 미국이나 일본, 독일의 판례를 뒤적여 보는 게 여전히 우리 판례의 변천사를 점치는 유효한 수단인지도 모르겠다.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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