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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그 아름답던 보수는 어디 갔나? / 권태호

등록 2006-09-19 20:40

권태호 정치팀 기자
권태호 정치팀 기자
아침햇발
“(…), 너희들, 왜 이러니?”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무섭던 담임선생님이 이민을 떠나자, 독어선생님이 담임이 됐다. ‘좋아라’ 난리를 피던 녀석들은 선생님과 자꾸 부딪쳤다. 지각생이 늘고, 반 성적은 최하위로 처지고. 큰 소리 한 번 낼 줄 모르던 선생님은 매를 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반발했다. 일부의 선동에 독어시간에 책을 펴지 않는, ‘수업 보이콧’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27살 여선생님은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고 말았다. 며칠 뒤, 열혈청년 옆반 선생님의 매타작으로 우리들의 쿠데타는 진압됐다. 17살, 우리들은 비겁했다.

2006년 9월2일, 서울시청 앞에서 사실상 ‘반정부’ 보수집회가 열렸다. 1980년 8월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보수 기독교인 중심으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광주항쟁 이후 석달이 안 됐을 때였다.

‘보수’가 일어선다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한다. 보수란, 기존의 가치를 지킨다는 뜻이고, 지난 10년을 잃어버렸다 하니, ‘그 이전 50년’을 지키겠다는 것 같은데, 그때 지켜야 할 그 ‘무엇’이 무언가?

보수할 게 없다는 것, 이게 대한민국 보수의 비극이다. 왕정, 헌정질서, 전통문화, 도덕. 외국의 보수들이 진보세력에 맞서 지켜왔던 것을 우린 자칭 ‘보수’들이 다 깨뜨려왔다. 외국에선 진보가 찬성하고, 보수가 반대하는 성매매가 우린 보수가 지지한다. 한국 보수의 독특함이다. 남은 건 ‘반공’ ‘친미’요, 그 뒤엔 ‘기득권’이 어른거린다. 홍세화는 이를 두고 “보수란 ‘가족·전통·자유’ 등을 보수하려는 정치세력이어야 하는데, 우린 분단상황에서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강준만은 “한국 상류층의 애국심이나 윤리적 수준이 한국 평균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결국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도덕성과 자기희생 여부로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모든 아테네 정치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때, 홀로 광장에 나서 쿠데타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이가 있었다. 솔론(기원전 630~560)이었다. 측근들이 말리자, 그는 “나는 늙은 나이를 믿는다”고 말했다. 이게 보수다. 아들이 없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를 최전선에 보냈다. 아그리파는 전사했다. 황제는 외손자 루치오, 가이우스도 반란이 일어난 아르메니아에 보냈다. 외손자들도 모두 전사한다. 이게 보수다. 신라 품일 장군은 난공불락 계백 앞에서 16살 아들 관창을 사지로 보낸다. 이게 보수다.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이방원을 만나러 선죽교로 향하던 밤, 등불 들고 말 고삐를 쥐는 하인을 물린다. “놔둬라. 나 혼자 가마.” 하인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었다. 이게 보수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이후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섬에 보내진다. 그는 “적군의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 숨진다. 이게 보수다. 생각은 달라도 존경할 수 있었던, 그 ‘아름답던 보수’는 다 어디 갔나?

영화 〈클래식〉에서 주희(손예진)에게 받은 목걸이를 다시 가져오려 포연 속으로 달려가던 그 맑디맑은 준하(조승우)도 월남전 용사였다. 가난한 집안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목숨 걸고 월남으로 갔던 이땅의 장남, 차남들. 참으로 아픈 세대였다. 그들이 보수라는 이름으로 한 묶음 되는 게 외려 서럽다.

권태호 국내정치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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