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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진보주의자로 산다는 것 / 박용현

등록 2006-10-03 18:23수정 2007-03-06 14:09

박용현 기자
박용현 기자
아침햇발
미국 연수 한 해 동안 인상에 남은 학내 시위 두 가지. 500평은 됨 직한 잔디밭에 밤사이 하얀 십자가가 빼곡히 박혔다. 십자가마다 10명의 태아를 상징했다. 보수 학생들의 낙태 반대 시위는 그렇게 사람 한 명 없는 전시작품이었다. 하루는 오렌지색 티셔츠 바람이 불었다. 가슴마다 “게이, 나는 괜찮아”라고 적혀 있었다. 하룻동안 그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게 진보 학생들의 동성애 지지 시위였다. 싱거웠다.

보수 쪽은 그렇다 쳐도 진보 쪽은 더 역동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불만이 커질 즈음, 학내 신문에 실린 한 학생의 글이 머리를 통 쳤다. 글의 제목은 ‘당신은 진보주의자로 살 돈이 있소?’라고 물었다. 어느 늦은 밤, 저녁 거른 배를 움켜쥐고 집에 가던 세라는 뭘 먹을지 고민스럽다. 주머니에 든 건 달랑 2달러. 좋은 식당은커녕 맥도널드도 부담스런 상황에서 타코벨이 눈에 띈다. 값싸고 맛있는 멕시컨 패스트푸드점. 달려가 막 주문을 하다 말고 세라는 발길을 돌린다.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다. 타코벨에서 쓰는 토마토는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물. 진보주의자라면 먹어선 안 된다. 세라는 집에 돌아와 차가운 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고 잠자리에 든다. 이러다간 노동 착취의 대명사 월마트의 저가 유혹을 견디기도 ‘열라’ 힘들 것 같다고 푸념하며.

돈 없이는 진보적 가치를 지키며 살기 힘들어졌다는 글의 논지도 흥미로웠지만, 글쓴이가 타코벨 앞에서 그토록 진지한 신독의 순간을 가졌다는 점이, 한밤중 진보와 일상의 그 만남이, 낯설게 머리를 통 쳤던 것이다. 그런 뒤 살펴보니, 학교 곳곳에서 일상적인 진보의 움직임은 작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날은 사형제 폐지 소모임이, 어느날은 정부의 첨단 감시체제 비판 세미나가, 어느날은 빈곤 어린이 지원 행사가, 어느날은 인종차별 반대 모임이, 그리고 어느날은 “게이, 나는 괜찮아” 시위가…. 진보입네 하는 이들에겐 타코벨이나 월마트 거부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런 일상적 모색들이 오래 쌓인 덕일 게다. 교정엔 전동 휠체어를 탄 학생들이 불편 모르고 쌩쌩 달렸고, 로스쿨엔 장애인법·인권법 강의들이 수두룩했고, 어린이 보호단체엔 검·경 담당부서까지 아예 이사와 공조체제를 갖췄고, 인구 5만 남짓한 도시에 으리으리한 여성 쉼터가 지어졌고…. 그 보수적이라는 미국 중서부의 소도시에서도 진보의 퇴적물들은 충분히 많았다.

이른바 진보세력이 10년을 집권했다면서도 무엇을 축적했는지 알 도리가 없는 한국 사회이기에, 작지만 진정 어린 진보의 몸짓이 더 소중해 보이는 요즘이다.

커피 생산지 농민들에게 공정한 값을 치르고 들여온 ‘착한 커피’를 마시는 처녀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환경과 공존하는 속도를 즐기는 청년들, 패스트푸드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려는 엄마들, 한달에 한번쯤 텔레비전도 전깃불도 끄고 촛불 아래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빠들, 대안 배움터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한겨레> ‘대안생활백서 시리즈’가 소개하고 있는 이런 일상의 실천가들은, 의식하든 않든, 늘 미래로 유예돼 왔던 진보주의자들의 꿈을 오늘 현재형으로 즐기며 사는 셈이다. 이들이야말로 단 1%의 진보일지라도 몸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단단한 진보주의자들이 아닐까. 그 즐거움을 방해받지 않고 나아가 더 확장해 누리고픈 소망이 있다면, 이는 어떤 추상적 외침보다 강인한 진보의 방어벽이자 추진력이 되지 않을까.

물론 환경을 위해 유기농 식품을 먹고 지구적 연대를 위해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일 따위는 분명 돈이 더 든다. 그래서 세라의 고민은 계속된다.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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