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논설위원
아침햇발
범여권이 구세주로 기대하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어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권 대선주자 1위를 달리던 고건 전 총리가 지난 1월 중도 하차한 데 이어 두번째다. 여권에게 정 전 총장의 출마 포기는 단지 한 예비주자의 감소가 아니다. 어렴풋이나마 그려 왔던 대선 전략까지 전면적으로 흔드는 대사건이다.
사실 여권 전략가들은 항상 정 전 총장을 가운데 놓고 구도를 짜 왔다. 정운찬-손학규-정동영 세 명을 묶는 ‘정손정 ’연대나 이들이 깃발을 들어 새판짜기를 하는 ‘후보 중심 신당론’ 등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손학규, 정동영 등 기성 주자에 외부의 참신한 인물인 정 전 총장이 가담하면 여권의 후보 경선은 한나라당 못지 않은 흥행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를 해 왔다. 특히 그는 햇볕정책을 지지해 김대중 전 대통령 쪽으로부터도 큰 호감을 받고 있는데다 대선의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도 출신이어서 서부벨트의 결합을 이룰 수 있는 적임자라로 여겨졌다. 그의 퇴장을 여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애초부터 잘못 꾼 꿈이었다. 경제학 교수에 대학총장을 지내는 등 화려한 경력과 참신성을 무기로 하루 아침에 뛰어난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바라는 것 자체가 허황하다. 정치판은 잘 정돈된 곳이 아니라 때때로 혼돈과 무질서가 판치는 곳이다. 그 곳의 지도자는 백마를 타고 오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부딪치고 깨지고 좌절하면서 스스로 큰다. 정 전 총장이 존경하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대학 총장에서 곧바로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뉴저지 주지사를 지내면서 정치력 검증을 거쳤으며, 당내 치열한 투쟁을 통해 지도력을 확립했다.
정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문에서 “정치는 비전과 정책 제시뿐만 아니라 이를 세력화하는 활동”이라며 “제가 그동안 소중하게 가져온 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치 세력화를 추진해 낼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눈앞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싶지 않을텐데 그는 여권이 대령해 놓은 ‘꽃가마 타기’를 냉철하게 거부했다. 역시 대학자다운 판단이자 결심이다.
정치권 외부의 잠재적 후보로 아직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이 남았지만, 여권은 이제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깜짝 인물을 등장시켜 깜짝 판짜기를 해 대선을 치르겠다는 꿈 말이다. 대선후보 중심의 신당이니 뭐니 하는 쇼를 하려 하지 말고 가치와 이념에 맞게 당부터 정비하라. 후보는 그 다음이다. 여권이라고 부를 정당의 실체가 모호한데 후보부터 따지는 게 말이 되는가. 열린우리당은 깃발을 내릴 날만 남겨놓고 있고, 민주당은 호남지역 재·보궐 선거 승리로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날 길이 없다. 누가 분당의 책임자니 하면서 서로 감정싸움을 벌여봐야 어차피 국민에게는 희망을 줄 수 없는 정당들이다.
정 전 총장의 자진 포기가 여권에는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도록 해주는 약이다. 여권 통합의 현실적인 두 주체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서로 영입 대상으로 삼았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중간세력 결집이 분산보다 더 의미 있다고 여긴다면 두 정당은 제3 지대 창당이든 합당이든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통합을 논의하라. 당연히 상대방의 부채와 정치적 자산을 떠안고 가야 한다. 그러고서 대선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얄팍하게 회피할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범여권 통합을 외치지 말고 조용히 각자 갈 길을 가라. 그게 차라리 한국 정치의 이념 분화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김종철/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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