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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어떤 위로 / 박경철

등록 2007-05-18 18:03수정 2007-06-21 13:50

박경철 시골의사·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박경철 시골의사·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삶의창
어느 늦은 밤 막 퇴근을 하려던 참에 40대 초반의 환자 한 분이 진료실에 들어섰다. 회색빛 얼굴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 겉으로 보기에도 말기 간경화 환자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 질문에 남편이 대신 대답했다. “수면제를 조금 처방받을까 해서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미 상투적인 대답이 준비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간이 안 좋으신것 같은데, 수면제는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정중하게 처방을 사양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종합병원으로 가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편에게 힘없이 기대어 있던 환자가 말했다. “선생님 말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잠입니다. 긴 잠. 깨지 않는 잠이면 더 좋고요.” 절절한 고통이 건너왔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은 고통이 너무 극심하면 24시간 잠을 잔다. 아니 24시간 깨어 있다. 쉬어야 할 뇌는 끊임없이 잠을 부르고, 병소를 쥐어뜯는 고통은 잠들고자 하는 뇌를 깨운다. 그래서 환자는 내내 잠들고 내내 깬다. 잠자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악랄한 병소들은 기꺼이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숙주인 몸이 죽어가면 병소도 같이 죽어가야 하는 운명임에도 병소는 악랄하게 자신의 숙주를 학대하고 괴롭힌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담관암을 앓고 있어서.” 처방전 쓰던 손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담관암. 길어야 1년의 여명을 가지는 사악한 병이다. 차트에 적힌 그의 나이는 41살. 아마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한둘쯤은 있을 터이다. 외과의사로서 지켜봐 왔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로밖에 없었다.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외과 의사를 하는 동안 비슷한 부위인 담도에 암이 걸린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위로에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선생님 그렇지요? 사는 사람도 있지요? 제게 그 분들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지금 내가 던진 위로가 과연 이 분들에게 긍정적인 구실을 할 것인가 두렵기도 했다. 대개 암환자들은 말기라는 판정을 받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십가지 민간요법과, 전국의 용하다는 사람들을 다 만나지만, 그 중에는 죽음을 앞에 둔 간절한 사람들의 희망을 이용해서 추악한 짓을 하는 사람도 셀 수가 없다.

내 설명을 들은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말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저 사람은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언제 포기하고 무너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저 사람 살아납니다. 연락처를 꼭 알려주십시오.”

더는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남자의 ‘사랑’과 ‘믿음’을 존중해야 했다. 옛 기록을 되짚어 대략 알려주고, 회복된 환자를 치료한 해당 병원을 찾아가 “그분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요청해 보라”고 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이미 ‘희망’의 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게 옳은 일이었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무조건적인 희망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거나 혹은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보다 ‘희망’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젠가 내가 다른 환자를 만났을 때 ‘의사 생활하면서 담도나 담관에 암이 걸린 환자가 완치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지요’라고 말 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박경철 시골의사·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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